해피버스데이

일면식도 없는이와 평생 꽃길을 걷기 위해

by 김태한

1650년 초기에 안용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안용복은 좌수영(左水營)의 수군으로 전선(戰船)의 노를 젓는 병졸이었다. 안용복은 두 번 일본에 다녀왔다. 처음은 납치된 것이고, 나중은 계획에 따른 자발적 방문이었다.
건국 이래 울릉도ㆍ독도에 관련된 조선의 방침은 섬을 비워 분쟁의 소지를 없애는 공도(空島) 정책이었다. 태종은 두 번(1403·1416년), 세종은 세 번(1419·1425·1438년)에 걸쳐 울릉도 주민을 본토로 쇄환(刷還)했다. 그러니까 조선 전기 이후 독도는 물론 울릉도에도 조선인은 살지 않았으며, 가끔씩 어업만 이뤄지던 상태였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1693년 3월에 일어났다. 그때 안용복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호키(伯耆) 주 요나코무라(米子村)에서 온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고, 조업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인원 부족으로 안용복은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것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꾼 변곡점이 되었다. 안용복은 인질이 되었지만 대담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 사람이 갔는데 억류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호키 주 태수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안용복의 거세고 논리적인 반발에 밀린 태수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막부에 판단과 신병 처리를 물었다.
막부의 회신은 5월에 도착했다. 막부는 안용복 등을 나가사키(長崎)로 이송해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면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내용의 서계(書契)를 써주게 했다. 이것은 17세기 무렵 일본이 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인 독도)가 자신의 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중대한 결정을 일개 어부인 안용복이 이끌어낸 것이었다.
제2차 도일은 안용복의 자발적인 결행이었다. 1696년 1월 막부는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과 일본 어민의 도해ㆍ어업을 금지하기로 결정했지만, 대마도가 서계 접수를 미루는 바람에 시행이 계속 늦춰지고 있었다.
그러자 안용복은 자신이 이 문제를 선제적으로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관리로 자칭해 도일하는 대담한 계획을 실행했다. 그의 준비는 치밀했다. 그는 울릉도ㆍ독도가 강원도에 소속된 것으로 그려진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之圖)]와 자신이 입을 푸른 철릭(靑帖裡- 무반 당상관의 공복), 검은 갓, 가죽신 등 증빙 자료와 물품을 마련했다.
1696년 3월 안용복은 조선 어민을 대거 이끌고 울릉도로 갔다. 그 뒤 일본에서 안용복은 32척의 배를 동원했다고 진술했는데, 1척에 5명씩만 잡아도 160명이나 되는 규모다.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일본 어민들은 예전처럼 조업하고 있었다. 양국의 협약이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안용복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안용복은 그들의 월경죄를 꾸짖고 다시 호키 주로 갔다. 그는 대담하게 행동했다. 그는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준비한 관복을 입어 정식 관원처럼 차린 뒤 호키 주의 수석 가로(家老) 아라오 오오카즈(荒尾大和)와 담판했다. 안용복은 대마도주의 죄상을 고발하는 문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호키 주에서는 그것을 막부에 전달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독도'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를 젓는 병졸 '안용복'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얼마전 TV프로그램에서 잠시 안용복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스쳐지나가는 정도였다.
안용복의 활동이 당시에 끼친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지적된다. 하나는 그동안 공도정책이 보여주었듯이 울릉도ㆍ독도와 관련해 희박했던 조선의 영토의식을 높였다는 것이다. 두 번에 걸친 안용복의 도일로 조선 조정은 두 섬의 영유권과 조업권이 분쟁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했고, 뒤늦게나마 적극적으로 대응해 권리를 확보했다.
다음은 일본(대마도)의 교섭태도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본은 주로 억지 와 기만에 근거한 외교를 유지해왔지만, 이 사건을 겪으면서 조선의 강경노선을 인식한 결과 유화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평가된다.
안용복보다 조금 늦은 시기를 살았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한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뤄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포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형벌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는 척박하다. 그러나 대마도는 한 조각의 농토도 없고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우환이 되어왔는데, 울릉도를 한번 빼앗기면 이것은 대마도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니 앞으로의 앙화(殃禍- 재난)를 이루 말하겠는가.
그러니 안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만이 아니었다. …… 그런 사람을 나라의 위기 때 병졸에서 발탁해 장수로 등용해 그 뜻을 펴게 했다면, 그 성취가 어찌 여기서 그쳤겠는가.
- [성호사설] 제3권 <천지문(天地門)> 울릉도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안용복 [安龍福] - 희생과 고난으로 독도를 지킨 조선의 백성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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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로 가려면 삼성역에서 내린 후 3번 출구로 나가야한다. ㄱ자로 꺾어진 모퉁이를 돌아 왼쪽으로 들어서면 다소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대형 연예인들의 생일 축하 사진이 들어간 광고판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크기의 그것들은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등, 평생 함께 가자는 등의 문구가 박혀있다. 한달 게제 비용만 최대 640여만원이라는 이 광고는 서울 지하철 아이돌 광고판 110여 개 가운데 약 30%는 중국 팬들이 게재한 것으로 추산된다. 가장 많은 아이돌 광고판이 들어선 삼성역에는 15개 중 5개가 중국 팬 광고라고 한다.
경쟁적으로 팬덤을 드러내기 위해 서로 응원하는 아이돌의 생일을 앞다투어 챙기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고액의 광고판을 만들기 위해 아마도 이들은 삼삼오오 모금 했을 지도 모른다. 모금 금액이 넉넉한 이의 사정은 그나마 나을 지도 모르겠지만 넉넉하지 못한 이들은 알바를 통해 자금을 조달 할 것이다. 그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매일 만나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기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누군가를 좋아할 자유는 있다고 할 지 모르겠으나 나 또한 이런 불편한 생일 축하 광고를 보고 싶지 않을 자유가 있다. 어느 순간엔가 강제적으로 타인의 생일을 기억하게 되고 축하를 해야만하는 상황이 연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팬덤이 만들어낸 이상한 이 상황이 좋지많은 않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나라를 위해 잊혀져간 위인들이나, 사회 곳곳에 따뜻한 이야기들, 억울한 이야기들을 알리는 것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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