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첫 시작을 첫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려하니 주변이들의 면박이 벌써 부터 귓가에 맴돈다. 아마도 또 “주접 싸고 있네.”라며 놀려댈 것을 생각하니 글을 읽을 때 즈음엔 어디 숨어있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려는 의지는 아마도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미안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든 남자들이 그렇게 미련하듯이.
봄의 따뜻한 햇살이 겨우내 숨어있던 초록을 깨우듯 열여덟에 그날은 그렇게 라벤더처럼 찾아왔다.
그 무렵 나는 꽤나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귀 밑을 훨씬 넘긴 두발 상태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유지하려 이리저리 선생님들을 피해 다녔고, 있는 힘껏 줄인 교복은 발목도 들이기 힘들어 했다. 게다가 비뚤어진 시선은 세상을 삐딱하게 보기에 딱 좋은 그것 이었다.
그날도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불려가 한껏 줄인 교복과 자르지 않은 두발 때문에 질펀하게 허벅지를 헌납하고 뒤뚱거리며 교무실을 나오는 길이었다. 벌써 한 주만 몇 번째 불려가는 지 모르겠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오며 나는 교실로 신경질적인 발걸음을 옮겼다.
2층을 지나 3층의 교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서서히 내려오는 교실이 눈에 들어올 때 4~50여명의 여학생들이 교실 앞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교실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의 속닥거림이 나를 기다렸음을 알 수 있었다. ‘왔어! 왔어!’라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학생 무리 중 나와 친분이 있는 J가 나에게 다가왔다.
“너 또 혼나고 왔지? 벌써 소문이 파다하다. 교무실에서 학주하고 싸웠다고.”
“잔소리 할 거면 가고. 그나저나 여기 왜 이렇게 모여 있어?”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이쪽으로 와봐. 여기 이 친구가 너를 좀 보고 싶어 해서.”
J는 나를 그 무리의 중앙으로 이끌었고 그들의 중앙이 홍해가 갈리듯 서서히 길이 열렸다. 그곳엔 160cm가 안돼 보이는 왜소한 작은 여학생 한명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서있었다. 몸은 자그마하고 새하얀 반팔 블라우스 밖으로 나온 그녀의 두 팔은 그을린 듯 까맸다. 얼굴은 어찌 할 바 모르는 부끄러움이 넘치고 있었다. 그녀는‘까만 콩’같았다.
“얘가 너 좀 보고 싶어 해서.”
“누군데?”
“일단 서로 이야기 해봐”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그녀는 죄인 마냥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호떡집에 불난 듯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다 갑자기 손에 들려있던 자그마한 종이 백을 쑥 주고는 황급히 반대편 교실 쪽으로 도망갔다. 그게 끝이었다. 내가 J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야, 쟤 모야?”
“아이참, 왜 저런데……. 다른 게 아니고 쟤가 너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데. 하도 부끄러워 하니까 우리 반 전체가 응원하러 모두 온 거지.”
“참 가지가지들 한다. 난 들어간다.”
머쓱해 하는 J와 한 무리의 학생들을 뒤로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조금 전 학생주임 선생에게 꾸중을 들은 것이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데 방금 전 상황으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손에 들린 종이 백을 버릴까 하다가 이내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는 책상에 앉아 잠을 청했다.
고등학생은 매일 야근 하는 회사원과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할지도 모르겠다. 수업이 끝나면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으로 이어지는 일정은 지치기에 충분했다. 물론 나도 그 자리를 지켜냈다. 다만 공부만 안했을 뿐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을 때 시계의 시침은 밤 12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아들이 지친 표정으로 집에 들어오는 것이 안쓰러우셨는지 그 늦은 시간에 여러 가지 음식들을 해놓곤 하셨다. 아직도 그때의 미소 된장국 냄새가 선하다.
그날 나는 잠에 들기 전 무심코 열어 본 가방에서 아직도 꺼내어 보지 않은 종이 백이 삐죽 나와 있다. 그제야 낮에 있었던 일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친하게 지내고 싶으면 전화번호나 알려달라고 하면 되지 그렇게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창피하게 할 건 뭐야.’
중얼거리며 종이 백 입구를 신경질적으로 열었다. 선물을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안에는 엽서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보기에도 꽤 많은 양이었다. 엽서와 엽서는 서로 엮여있었고 모두 펴보니 내 방에서 거실을 가로 지를 만큼 많은 양의 엽서였다. 나는 몇 개인지 궁금해서 세어 보았다. 정확히 100장이었다. 각 한 장씩에는 여백이 모자랄 만큼 빼곡히 글자들이 차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육필의 엽서였다.
놀란 것도 잠시, 그 자리에 앉아서 한 장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엽서의 첫 장은 그녀의 인사로 시작했다. 곳곳에 긴장의 흔적들이 역력 했다. 엽서 중간 중간에는 아까 몰려왔던 무리들의 메시지도 껴있었다. 제법 친구가 많은 사람인 듯 했다. 어느새 엽서의 의식 흐름을 따라가며 읽고 있었고 그녀가 긴장할 때는 같이 긴장하고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으며 읽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엽서의 마지막 장이 되었고 그제야 그곳에 본인의 연락처를 수줍게 올려놓았다. 꼭 연락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말과 함께.
그것이 첫 시작이었다. 다음날 저녁 나의 연락과 함께 시작 된 만남은 20대 중반이 될 즈음 까지 꽤 오랜 시간 이어 졌다. 우리는 그 시간 안에서 함께 웃고 울었으며, 서로의 다른 모습에 다투기도 하며 다시 닮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날은 다툼 뒤에 여느 때와 같이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 집 앞으로 찾아간 어느 날 이었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그녀가 왠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차가운 도로 만큼이나 그녀의 마음이 식어있었다. 잦은 다툼은 서서히 그녀의 마음에 벽돌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몇날 며칠 동안의 설득에도 결국 돌아선 마음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그렇게 만남은 7년 만에 끝났다. 이후 수년 동안을 많은 아픔을 주었다는 죄책감에 항상 마음 언저리는 무겁고 싸늘했다.
서른 중반에 퇴사를 며칠 앞둔 날 1월의 이른 아침의 일요일이었다. 해가 오늘은 높게 떠오르려는 듯 햇볕이 따스하게 차가운 사무실의 벽을 쓰다듬으며 넘실거렸고 구름은 솜사탕 같이 달달해보였다. 퇴사를 위해 일요일 아침 사무실을 찾았다. 지난 8년의 짐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8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었다. 쌓인 기억만큼이나 정리해야할 물품들이 많았다. 평소에 아무생각 없이 지나치던 물건들이 눈 안에 새롭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뀐 해 만큼이나 같이 해온 다이어리들은 한손에 들기에도 묵직했고 수십 권의 업무 파일은 색깔별로 캐비닛 속에 반듯하게 세워져 일렬로 줄서 있었다. 그 밑 칸에는 채 읽지 못한 여러 권의 책들이 놓여 있었다. 버려진 박스들 주어 와서 책들을 담기 시작했다. 담다보니 두 박스가 넘는 책들이 줄을 지어 나왔다.
모두 정리가 되었을 즈음 책이 담긴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야속한 문이 먼저 와서 나의 어깨를 턱하니 세게 밀친다. 그 자리에서 넘어지며 박스를 놓쳤고 떨어진 박스는 옆구리를 벌린 채 차곡차곡 정리되어있던 책들을 쏟아 내었다. 순식간에 바닥은 서류와 책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쏟아진 책들 사이에서 낯선 책 두 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똑같은 모양의 책은 서로 다른 파란색과 주황색으로 나누어진 책이었다.
까마득한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니 짧은 메시지가 적혀있다.
‘스물두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스물두 번째 생일에 그녀가 준 생일 선물이었다. 그 책은 순간 나의 기억의 끝자락을 이끌고 떠올라 단숨에 이탈리아 피렌체로 나를 이끌었다. 그 안에서 준세이와 아오이는 좁혀지지 않은 감정의 끝을 잡고 서로를 원망하고 원하고 있었다. 그들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누었던 그녀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우리가 언젠가 헤어지게 되면 그날로 부터 10년 뒤 두오모 성당에서 보는 거다. 싫던 좋던 꼭 거기서 만나는 거야. 알겠지?”
넘실대는 햇볕이 유난히 따뜻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