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살 싱글맘이 갭이어를 가진 이유
8년 전 나는 1년간 갭이어를 가진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5년간 기간제 교사로 일했다가 잘렸고 4년간의 이혼 소송에서 전 재산을 잃었으며, 당시 기준으로 부양해야 할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딸아이가 있었다. 그간 여러 스트레스로 몸도 마음도 엉망이다. 수중엔 약 천만 원 정도 퇴직금이 있지만 다달이 들어가는 집세에 어디 일자리가 막연한 상태에서 갭이어를 갖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춰야 했다.
여러 상황이 한꺼번에 몰려 엉망이 되버린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포기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은데 내가 뭘 잘하는 지도 모르겠고. 그런 상태에 갑작스레 찾아온 생명에 부랴부랴 결혼해서 아이 낳고. 남들 취업준비하고 사회생활에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나는 임신, 출산 및 육아와 전쟁 중이었다.
그럼에도 무언가는 해보고 싶어서 대학 시절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강요로 억지로 따놓은 교사 자격증 덕분에 기간제 교사에 도전할 수 있었다. 처음 두 달만 일하기로 했던 학교에서 5년간 일했다.
내가 학교라는 조직에 들어간 건 내 상황에 그 옵션이 최선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늘 궁금했다. 아버지는 나같이 고집 센 여자는 회사라는 조직에서 절대로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누누이 말씀하셨고 다만 여자도 직업은 있어야 하니 그나마 수업에 단독 권한이 있고 고용이 보장되는 교사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그래서 학교가 나에게 잘 맞는 곳인지 알고 싶었다.
막상 간 학교는 내 생각과 전혀 달랐다. 일단 월급이 초봉 150만 원이었다. 심지어 정교사는 연금 때문에 더 적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은 느꼈지만 내 가슴을 뛰게 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과거보다 정교해지고 복잡해진 입시 제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영혼을 죽이는 상대 평가에 성적에 따라 서열을 나누고 다양성이라곤 조금도 인정 안 하는 학교. 담임이 되었을 때 가장 고역이었던 일은 청소시키기와 화장하지 말라는 잔소리였는데 누군가에게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것이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고 가뜩이나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의 교복에서 한창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은 그 나이에 화장까지 하지 말라니 공감이 전혀 되지 않았다. 지금도 서걱서걱 소리만 가득한 삭막한 고3 교실의 피곤에 절어 있는 아이들의 텅 빈 눈동자가 가끔 생각난다.
무엇보다 나는 내 아이의 미래를 보고 온 거 같았다. 초봉 150만 원에 매년 오른다 해도 당시 월세를 살고 있던 내가 아이 양육에 이후 사교육비마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당시 나의 심정은 사회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안정된 학교로 알려져 있는 꿈의 직장은 사실상 외벌이로 살기엔 불가능하다는 것, 무언가를 시작하고 탐구하기에 최적의 뇌상태라고 알려져 있는 청소년기에 창살 없는 감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니 참 암담했다. 꿈 많던 어린 시절의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서른다섯의 처지였다.
내가 갭이어를 가진다고 했을 때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애 대학 갈 때까지 죽었다 생각하고 돈벌어야지 어딜 가?
Midlife crisis(중년의 위기)가 일찍 찾아온 거 같은데 인생 별거 없어. 다 그러고 살아."
나는 갭이어를 통해 여러 도전들을 했고 지금 나는 그 도전의 결과로 내 평생의 사랑을 만나 아이와 함께 내가 꿈꾸는 가정을 꾸리고 캐나다에서 내 생애 처음으로 글로벌 기업에 취업도 했다.
결과적으로 갭이어는 Midlife crisis가 아니었고 오히려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가 내겐 crisis였다.
만약 그 해에 내가 쉬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떨까 생각하면 참 아찔하다.
어제 우연히 유튜브에서 '쉬는 청년들'이라는 제목의 뉴스를 봤습니다. 그중 제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었는데요.
"청년인구 줄어드는데 '쉬었음' 청년은 1만 3천 명"
갭이어라는 말도 있는데 '쉬었음' 청년으로 표현 한 것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비교적 적성 탐구에 맞춰진 서구권 나라들의 교육에도 사실 고등학교 3년안에 자신의 적성과 특기를 찾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졸업 후 바로 대학에 가지 않고 갭이어를 갖는 것이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 기간 동안 돈을 모아 여행을 한다거나 단기 코스 프로그램들을 듣기도 하죠. 한창 자신이 누구인지, 뭘 잘하는지 알아가야 하는 청소년기에 입시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가는 한국의 현 상황에서 갭이어를 갖는 청년들이 나오는 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때만 가능한, 잃을 것 없기에 여러 도전으로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특권을 가진 꽃다운 청년들을 그저 일해야 하는 인력으로만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더 많은 청년들이 여러 도전을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행복하게 살길 바랍니다. 그런 행복한 청년들이 많아지면 저절로 세상도 행복해지리라 믿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썸네일 사진은 갭이어때 한 미국-캐나다 자동차 횡단 여행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에 광활하게 펼쳐진 대륙 위 도로를 달리며 저의 새로운 미래를 꿈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