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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팅게일 Jun 17. 2024

Father's Day, 아버지와 쓰라린 기억을 넘어

안녕하세요,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는 작가 #라이팅게일 입니다.

캐나다는 오늘 'Father's Day'입니다.

아침에 아이와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발칸 슈퍼마켓에 가서 갓 구운 빵과 디저트를 사 와 조촐한 파티를 했습니다. 역시나 이런 기념일에 취약한 남편은 오늘이 Father's Day인걸 몰랐고, 덕분에 깜짝 파티는 대성공이었어요. 

돌이켜 보면, 아버지에 관한 추억은 거의 없거나, 있다면 나쁜 기억뿐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생애 첫 기억은 일본의 한 보육원입니다. 아버지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온가족을 데리고 무작정 일본으로 떠나셨어요. 넉넉하지 않은 유학생활에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셔야 했죠. 80년대 중반 일본은 한국인에게 친절하지 않았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부모님도 생존 모드가 아니었나 싶어요. 

일본에서 초등학교 예비 소집을 막 마친 어느 2월,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할머니를 돌보게 하시고, 홀로 일본으로 떠나셨고 히라가나 밖에 몰랐던 제가 갑자기 한국 초등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말이 어눌한 제가 일본에서 왔다고 또다시 따돌림을 당했고 5학년까지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와 함께 산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제게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었어요. 어머니는 까다로운 할머니와 네 분의 고모들 틈에 남편도 없이 할아버지 삼년상을 치렀습니다. 힘들었던 어머니는 장녀인 제게 여러 형태로 한풀이를 하셨고 그래서 더욱 아버지가 그리웠는지도 모르겠어요. 

6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셨는데 혼자가 아닌 한 여성분과 함께 돌아오셨습니다. 그때부터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시끄러운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집안의 폭풍이 잠잠해진 고등학생때부터 아버지는 제 인생에 갑자기 들어와 중요한 의사 결정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제 적성/의사와 상관 없이 그저 아버지의 역할이란 당신께서 옳다고 생각하시는 길을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자식이 그 길을 가게끔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던거 같아요. 그 길이 저와 맞았다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불행히도 맞지 않았고 엇나가기 시작,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제가 정서적으로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2년 전, 제 나이 마흔이 되어섭니다. 

설명이 길었습니다만 저는 아버지의 사랑이 뭔지 모릅니다. 제 인생에 아버지와의 인연은 없었다고나 할까요.

아버지의 사랑은 지금 저의 남편을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제 남편은 생물학적으로 제 딸아이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지금의 남편과는 두 번째 결혼으로, 첫 결혼에서 얻은 딸아이와 새로운 가정을 이뤘어요.

아이는 이혼 소송이 시작된 4살때 아이 아빠와 헤어졌고 그는 이혼 소송과 동시에 해외로 떠났기에 아이도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요.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저는 결혼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해 연말 남편 친구 가족이 푸껫으로 우리 셋을 초대했고, 우연히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으로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어요. 신기하게도 만난 지 하루만에 남편과 아이는 둘도 없는 부녀 지간이 된 걸 보면서 확신이 들었죠.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나도 아이도 모두 행복할 수 있겠다고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저처럼 한평생 모르고 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한국에서는 재혼에 대해 이런 시각이 있지요. 특히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게는 더더욱요.

"어휴, 뭐 하러 결혼을 또해~ 그놈이 그놈이야~ 애도 있는데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게다가 상대는 초혼이라며. 그냥 아이만 바라보고 살면 안 돼?"

그 사람이 별로면 당연히 고려조차 안했겠지만 상대가 너무나 훌륭하고 아이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건강하게 클 수 있는 기회인데 Why not이죠!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 결혼했고 예상대로 아이는 아빠 사랑을 빈틈없이 받으며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남편도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고, 그 이후 남편은 아버지와 교류는커녕 얼굴도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남편은 아버지라는 역할에 타고났나 싶을 정도로 아이에게 좋은 친구이자 아빠이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아이가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5년 전, 남편은 아이에게 공식적으로 아빠가 될 것이라는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지금도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아이가 행여나 밖에서 곤란해질까봐 하는 염려에서였죠. 

"세상엔 여러 형태의 가정이 있어. 나는 너의 아빠고 이름을 부르는 건 괜찮지만 외부에는 아빠라고 소개해야 될거야. 너는 아빠가 둘이야. 쿨하지?"

덕분에 아이는 이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정체성의 큰 혼란 없이 행복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 둘을 통해 배웁니다. 고등학생이 된 다 큰 딸아이를 매일 안아주고, 잘 때 아이 침대에 함께 누워 아이가 잠들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죠. 텐트 치는 법과 공을 차는 방법을 배우고, 집안 수리나 가구 조립을 할 때 꼭 아이와 함께하며 가르쳐 줍니다. 얼마 전 운전연습 면허를 딴 아이에게 틈날 때마다 운전 연습도 시킵니다. 과학 덕후인 남편과 거의 매일 과학 관련 여러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우고, 가끔 실험도 하죠. 그 덕분인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과학입니다. 

남편이 이끈 아이 학교 진학 관련 교육청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든든한 우산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줬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빠를 만난 아이와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통해 매일 기적을 봅니다. 몰랐던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저 또한 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께 존경을 표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팅게일 #Happy_Fathers_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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