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지? 오히려 좋아!
제주 한 달 살이를 계획하며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한라산 등반’이었다.
우리 집엔 휴일에 가족끼리 가까운 산을 오르거나 하는 등의 산과 가까이 지내는 문화(?)가 없었기에 나에게 등산이란 그저 남의 일이었다.
그런 나도 ‘제주’하면 한라산에는 한 번 올라야 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꼭 가리라는 다짐을 했다.
그러던 중에 친한 친구가 제주에 놀러 오겠다고 했고, 만만치 않게 산과 거리가 먼 친구가 “나 한라산 가고 싶어”라고 했다. 넌 미끼를 던졌고 난 그것을 물어분 것이여. 그 길로 우리는 바로 한라산을 오르기로 약속을 하고, 렌털 샵에 가서 이것저것 장비를 대여해왔다.
한라산의 정상인 백록담에 오르는 코스가 예약제로 바뀐 후로는 예약이 하늘에 별따기라 우리는 정상보다 200m 낮은 윗세 오름을 ‘영실 코스’로 오르기로 했다.
추위와 더위가 오가는 등산길에 입고 벗을 수 있는 얇은 옷 여러 개와 얇은 패딩 하나, 그리고 각종 등산 장비들과 먹을 것들을 야무지게 준비했다.
대망의 등반 날 새벽 6시 40분. 여러 겹 입은 옷이 장기를 눌러 불편한 속을 참아가며 한라산을 향하고 있을 때 조수석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근데 우리 라면 먹으려면 끓는 물 있어야 하는데, 너 보온병 있어?”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여기는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수요가 있는 곳이라면 어떻게든 경제가 창조되는 곳인데. 체감온도가 40도까지 올라가는 한여름 인왕산 정상에서도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를 만날 수 있는 곳인데. 나는 당연히 정상(영실코스의 정상)에 오르면 컵라면과 뜨거운 물을 파는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끓는 물도 없었고 보온병은 더더욱이나 없었다. 기껏해야 텀블러가 있었지만 입구가 막혀있지 않아서 가져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또 여기는 ‘K-정’의 본토 아니던가. 정상에서 만날 빨간 등산복의 아주머니들에게 조금씩 동냥받는 그림을 상상하며 일단 가보기로 했다.
정확히 1시간을 달려 7시 40분, 1100 도로 입구(한라산 입구로 진입할 수 있는 도로)에 도착했다. 전 날 눈이 많이 내려 혹시나 도로가 통제되지 않았을까 불안했는데, 역시나. 경찰관이 입구를 막고 내 앞의 차량들을 돌려보내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스노우 체인 있으세요?”
“없는데요..”
“그럼 못 올라가요. 안쪽에는 눈이 훨씬 더 많이 와서 위험해요”
“헉.. 그럼 어떡해야 해요?”
“밑에 내려가면 탐라대학교 앞에 버스가 와요. 그거 타고 들어가시면 돼요”
등산 꼬꼬마들에게 닥친 첫 번째 난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밤에 정보를 찾아보면서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이 주차였다. 눈이 많이 와도 주차를 할 수 없고, 늦게 가면 주차장이 만차라 입구보다 훨씬 밑에(영실 매표소) 주차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매표소에서 영실 입구까지 40분가량 걸어서 올라가는데 경사가 생각보다 높아서 등산 시작도 전에 진이 빠진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버스도 입구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매표소까지만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걱정했던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가 눈앞에 펼쳐져 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본 터라 마치 영화 ‘래버넌트’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500m도 안 되는 곳에 나와 같은 처지의 차들이 몇 대 보였고, 일단 그곳에 정차를 하고 버스 운행 정보를 찾아보았다. 첫 차 시간은 9시 10분. 1시간이 더 넘게 남았다.
‘이렇게 늦게 들어가도 되나? 한 시간 동안 뭐하지?’하는 생각에 멘붕이 왔을 때, 밖에서 각 차량의 차주들이 나와서 비상대책회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 또한 이 차의 대표로 헐레벌떡 뛰어 나가서 회의에 참석했다. 네 팀 중 두 팀은 첫 차를 기다리지 않고 반대편으로 돌아서 수목원(?) 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피곤했던 나는 버스를 기다리는 편에 서기로 하고 차로 돌아왔다. 나도 참 ‘될 데로 돼라’는 편이지만 1분도 되지 않아 잠에 빠져버린 내 친구를 보며, 오늘 나의 어깨가 무겁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시 40분, 사람들의 말소리에 눈을 떠보니 내 차 앞에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향을 살피러 옷을 추슬러 입고 나가보았다. 버스 줄 맨 앞에 프로등산러의 기운이 느껴지는 아저씨 두 분이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경험상 무리의 선두에 있는 사람들은 실력자이거나, 실력은 없지만 정보가 많거나, 그냥 부지런하거나 셋 중 하나였다. 후자만 아니길 바라며 말을 걸었다.
“버스 줄 기다리시는 거예요?”
“네~ 이제 곧 와요. 얼른 여기 와서 줄 서요”
아직 단잠에 빠진 친구를 급히 깨웠다. 잠을 실컷 자고 에너지가 충전됐는지 친구는 연신 “가보자고”를 외쳐댔다. (이 말은 이 날 우리의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얼른 채비를 하고 버스 줄에 합류했다. 20분쯤 기다렸을까, 지루한 기다림의 끝과 불안감의 해소를 상징하는 버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너무 기쁜 나머지 박수를 연신 쳐댔다. 사람들은 꿀꺽 침을 삼키며 버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는 버스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어? 왜 저러지?’ 찰나의 순간 버스는 우리를 쌩-하고 지나쳤고 버스 안에는 이미 종점에서부터 실려온 등산객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헐’. 짧은 탄식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두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다음 편(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