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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May 19. 2023

‘이 정도면…’ 의사의 안타까운 한 마디

[시간 순번 18] 약물 배출

임신 7주 차는 태아 중추신경이 발달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며 엽산 복용이 필수라고 한다.

하지만 유산 확진을 받은 다음 날 엽산을 포함한 모든 영양제 복용을 중단했다. ‘살아서 뭣하리…’라는 엄마로서 해서는 안될 생각을 하며.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임신 증상인가’ 의심했던 증상들이 하나 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그런 증상은 임신입니다’라고 명시하진 않았지만 애를 가진 사람만 느끼는 묘한 증상들 말이다.

배 안 쪽에서 바깥쪽으로 콕 콕 하고 찌르는 느낌이라던지, 뻐근하다 싶은 감각이라던지 이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빠르면 6주 차부터 한다는 입덧도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그냥 더부룩한 포만감과 음식을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은 희한한 느낌만 있다.

이 더부룩함 때문에 55 사이즈를 자랑하는 내 허리둘레는 입던 바지며 스커트가 잠기지도 않을 정도 배가 나와 있었다.


이런 느낌과 더불어 세트로 온 것 같은 악몽을 꾸는 기분.

책상 앞에 있어도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해도, 잠을 자도, 아침에 일어나도 꿈속에 있는 것만 같다.

임신도 아니고 임신이 아닌 것도 아닌 이 기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정말이지 다른 건 머릿속에 하나도 없고 오로지 ‘내가 유산을 했다’는 한 가지 생각뿐이다.


기다려보기로 한 4일은 어김없이 흘렀고 또다시 초음파 검진대에 누웠다.

초음파 의사 표정 변화가 전혀 없으며 잠시 후 방을 바꾸어 옆 방에서 다시 해보자고 했다.

방을 옮겨 간 곳에는 유산 확진 후 다시 본 초음파에서 심박수를 보여준 그 의사가 있었다.

태아 심박을 본 날 만큼이나 프로브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자세히 들여다봤다.

혹시나 심박이 있다면 영상을 녹화해 달라고 요청해 놨기 때문에 의사의 말을 청각을 곤두세워 기다렸다.


잠시 후 한 마디.

“심박이 장비에 안 잡혀요.”

초음파 상 육안으로는 심장 뛰는 게 보이는데 장비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고 한다.


더 두고 보자고 했던 4일 동안 물에 젖은 휴지조각처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터라 심박이 안 잡힌다는 말이 그다지 충격은 아니었다.

아니 그동안 떠올렸던 더 최악의 상황인 ’ 기다리는 동안 원래 주수를 따라잡아서 정상 속도로 심장이 뛰고 있으면 어쩌나 ‘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기다리는 동안 마음 추스름을 이유로 약간의 술과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커피도 마셨지.

게다가 임산부 필수 영양제도 중단했으며 임신 유지시키는 주사도 끊었단 말이지. 이런 상황에 산다 해도 정상일리 없어라고 위로해 본다.


초음파를 본 후 진료실로 가면 담당의사의 말을 듣게 된다.

이때 듣는 말이 아이를 그대로 둘지 말지 결정한다. 초음파실에서 분위기 다 파악했으니 예상하는 그 말만 들으면 된다.

진료실에서 의사와 마주했을 때 초음파 영상을 본 주치의는 끝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말을 했다. ”이 정도면…“

나는 화답하듯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어요.“라고 말하며.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무궁이의 아기집과 아기 크기를 물어보았다. ”하…“하는 짧고 의미 없는 한숨을 내뱉으며 주수보다 작디작은 사이즈를 알려주고는 내일 입원실에서 보자고 했다.


<입원 약물 배출>


입원했던 2023년 2월 9일과 10일은 오랜만에 촉촉한 비가 내렸다.

배를 부여잡고 끙끙 앓고 있던 9일에서 10일 넘어가는 밤 사이 내린 비였는데 가뭄 속에 내린 단비라고 한다.


의과대학까지 갖추고 있는 상급종합병원이라 환자와 얽히섥히 일반인과 보호자들까지 병원은 북적거렸다.

심지어 학위수여식(이라 하고 졸업식이라 부르는)이 있는 날짜라 주차장은 최하층까지 내려가도 만석이었다.

입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벽에 바짝 붙여 통로 주차를 하고 입원 환자라 중간에 내려올 수 없으니 잘 봐달라는 인사까지 주차요원에게 깍듯하게 했다.


이 거대 병원에서 만난 주차요원과 간호사, 수납 직원 등 대다수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그들의 온화함에 유산을 했다는 울적한 마음이 다소 안정되는 면도 있었다.

이틀이지만 소독약과 세제로 세탁하여 바싹 말린 익숙하지 않은 환자복과 여러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입원실이라는 공간,

무엇보다도 심히 안쓰러운 마음을 그칠 수 없었던 출산을 위해 입원한 만삭의 임산부들 속에 태아를 배출하기 위해 앉아 있는 나 자신을 정체성을 찾고 견뎌야 한다. 눈 가리고 귀 막고 지내자. 이 치료만 제대로 끝나면 이곳에 다음에 올 일은 출산을 하러 오는 것이라고 암시를 걸었다.


병실에 남아있는 병상 중 원하는 자리를 고르라고 했는데 창밖도 볼 겸 기둥 없는 창가 자리를 택했다.

이 날 밤 비가 내리려고 낮부터 하늘은 회색 구름을 밀어내지 않고 촘촘히 품고 있었다.


자궁 수축이 부작용인 약을 과량 투약해서 태아를 배출시키는 방식인데 쌩으로 버티면 꽤나 아프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는 병원이다. 고통과 불편함이 있다면 모든 약이 준비되어 있고 신속한 처치가 가능한 곳 아닌가.

투약과 동시에 진통제도 놔주어서 통증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워낙 아프지 않다 보니 중간중간 상태를 보러 온 간호사에게 “약빨이 제대로 받고 있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약을 넣은 건 내 몸인데 그녀라고 약효가 나타나고 있다는 걸 알리가 있나.

그저 오슬오슬 춥다며 준비해 온 담요를 덮고 그 위에 입고 온 잠바까지 펼쳐 올려놓고 수면양말을 신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약 부작용이 오한이라 추워하시는 거 보니 약효는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라며 쌩긋 웃어주었다. 이 병원은 간호사의 이런 따스한 모습에 안심이 되곤 한다.


태아가 바깥으로 빠져나온 걸 확인하려면 검체를 반드시 수거해야 한다. 때문에 무언가가 배출된다면 먼저 처리하거나 버리지 말고 무조건 간호사실로 가져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알겠습니다 간호사님.’ 이들을 맹신하고 따라야지 이틀 동안은.


그 자궁 수축이 부작용이라는 약은 다른 부작용들도 데리고 다녔다.

8개는 질정으로 투약하고 6시간 후에 또 6알을 먹었는데 약이 얼마나 독한지 먹은 지 20분 지나자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진통제 병이 달려있는 스탠드를 질질 끌고 간호사실로 가서 “저기요… 저기… 너무 토할 거 같아요.”라고 말하고는 간호사가 쥐어준 비닐봉지에 토사물을 쏟아냈다. 소화기관에 넣어준 음식은 웬만해서 다시 반납하지 않는데 여태껏 살아온 동안 이례적인 일이다.

저녁 먹은 음식물처럼 보이는 게 달랑거리는 비닐봉지에 담겨 있자 간호사는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또 그걸 비닐 위에서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이용해 꾹꾹 눌러보았다. 내가 토한 걸 들여다보고 손으로 눌러보다니 참 극한직업이구나…

이것 외에도 춥다가 열이 38도가 넘게 올라갔다가 진통제를 먹어도 배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고도의 통증도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없애는 일만큼이나 약도 독하디 독했다.


새벽 3시가 되기 5분 전, AM 2시 55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인체란 매우 신비하다.

뭔가가 몸에서 나오고 있는 느낌이 뚜렷했고 단 번에 ‘배출되는구나’라고 인지했다.

평상시 경험해보지 못한 느낌이라 금방 알 수 있었고 옆으로 새지 않도록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양 무릎을 침상에 대고 똑바로 세웠다.

역시 검체로 보이는 것이 덩어리째 나와있었고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아가야 잘 가.“

시키는 대로 간호사실로 가져갔다.

간호사는 두 손으로 고이 받아 가져가더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내 태아가 나온 게 맞는 것 같다며 주사 한 대를 더 놔주고 병실로 다시 들어가라고 했다.


검체가 나온 후에는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한 시간 정도는 통증 없이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병실이 있는 복도를 왔다 갔다 하다 휴게실 가서 앉아 창밖에 빗방울을 바라보기도 했다.

복도에 늘어서 있는 각 병실 문 옆에는 안에 있는 사람들 이름 일부와 나이가 적혀 있는데, 하나씩 보고 지나가다 문득 깨달았다.


‘이곳에 입원한 사람 중 내가 나이가 가장 많구나.’ 

고령임을 인지한 순간 임신 앞에서는 나이가 죄악이라고 또 한 번 서러웠다.

정말이지 임신과 관련된 모든 위험 요인은 산모의 나이가 많은 경우라는 이유를 꼭 하나씩 끼고 있는 공통점을 본격적으로 임신 준비하며 알게 되었다.


창밖에 빗방울은 꽤 굵었고 유리창에 흐르고 있는 정도를 보니 지나가는 자동차에 세차 수준으로 물을 뿌려댈 것 같았다.

나뭇잎이며 흙이며 온통 젖었을 것이다. 길가에 지나가는 차들의 젖은 빨간 불빛도 다들 목적지를 향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딱히 내 잘못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시기에 유산은 태아에 뭔가 이상이 있어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기에 자책은 없었다.


한밤중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그제야 산부인과 병동 입구 앞 만삭 임산부가 미소 짓고 있는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 입실할 때 가득 차 있던 간호사실에 이 시간에는 한 명만 남아 지키고 있는 것도 보였다.

잠시 눈을 붙였다 아침에 일어나야겠다. 조금 더 잘 생각에 병실로 돌아가 침상 위에 다시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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