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그 녹진한 세계로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한 학생이 서 있다.
쇼윈도 안쪽에 형형색색 아이스크림이 잡아 끄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건 학생만이 아닐 테다. 장난기 가득한 어린이도, 키가 180이 넘는 남자도, 머리색이 금발이고 엉덩이가 큰 여인도, 그리고 이따금 강아지도.
은색 무광 사각 통에 담겨있는 쫀득한 아이스크림을 점원이 한 스쿱씩 떠준다. 받아 든 왼손에는 컵을 들고 오른손에 손가락보다도 짧은 스푼을 쥐고는 가게를 나온다.
골목에는 다채로운 아이스크림 파는 가게가 즐비해 있고 이와 못지않게 피자와 스파게티를 파는 작은 가게들도 눈에 띄게 보인다.
간판 아래 바깥쪽으로 뻗은 파라솔은 차양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야외 작은 테이블 의자를 차지한 손님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숟가락을 입에 넣어 쪽쪽 빨며 달콤한 풍미를 느낀다.
사람들이 걷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 사이에 이렇다 할 구분이 없고 바닥에는 가로 10센티 세로 10센티 작은 타일들이 박혀있다.
일반인이 거주하는 평범한 길가에 어느 순간 나타나는 웅장한 성당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이탈리아다.
대학 시절 유행한 헝그리 정신으로 간 유럽 여행은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었다.
최소한 쓸 돈만 가지고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 위주로 다니자는 배낭여행은 한 여름 땡볕에 종일 걷느라 다리 아프고 목마르고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가장 힘들었던 건 음식이다. 매일 빵에 치즈를 넣어 딸기잼을 발라 먹었다. 20년을 뜨끈한 국에 흰쌀밥 말아 김치 깍두기 곁들여 훌훌 먹던 토종 한국 입맛은 계란, 우유, 햄, 빵으로 통일되는 삼시 세 끼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한국 음식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결국 겉이 딱딱하고 흰 속살이 결결이 찢어지는 빵을 받아 들고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아침을 못 먹고 현지 민박집을 나선 어느 날 허한 배를 달래며 걷다 길가에서 젤라또 가게를 마주쳤다.
한국에서 보던 떠주는 아이스크림이라고는 핑크색 외관에 핑크색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 몇 개까지 고를 수 있다며 말해주던 곳 뿐이었다.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가지씩 골라 먹으라던 그 브랜드는 어느 지점에 가도 같은 메뉴가 있었다.
헌데 이곳은 핑크 아이스크림 가게보다 더 신기하고 다양한 아이스크림이 작은 규모 상점으로 길가에 즐비하게 있다.
직원들은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다. 심지어 가는 곳마다 아이스크림 종류도 달랐다. 현지에 그들은 그 아이스크림을 젤라또라고 써놓았다. 신세계다.
동그란 덩어리에 조그마한 스푼을 쿡 찔러 넣고 한가득 떠올리면 쫀득한 젤라또가 똑 떨어져 나온다. 처음 입에 넣은 순간 그 맛은 국내에서 먹은 핑크 가게 것과 비교가 안되게 맛있었다.
여행 기간 내내 매일 먹고 싶을 만큼 입맛을 잡아끌었던 이탈리아 젤라또는 아쉽게도 딱 한 번 먹을 수 있었다. 한 스쿱에 몇 유로를 내야 하는 비싼 가격은 끼니 챙기기도 빠듯한 배낭족에게는 특별식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모 프랜차이즈 버거 매장에서 망고 썬데이 아이스크림을 할인해서 1900원에 판매한다는 광고지가 눈에 띄었다.
망설임 없이 들어가 부담 없이 키오스크에서 주문했다.
한 컵 받아 든 아이스크림은 그 시절 로마 거리에서 처음 먹어본 젤라또보다 양도 많고 향도 진했다.
젤라또가 스쿱으로 떠서 판매한다면 썬데이 아이스크림은 수도꼭지처럼 생긴 레버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면 받치고 있던 컵에 눈이 쌓이듯 담긴다.
자칫하면 일렬로 위로 쭉 뻗어 적은 양이 담길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면 컵 잡고 있는 손을 살살 돌려주어야 빈 공간 없이 가득 찬다.
젤라또에 비하면 쫀득함도 덜하고 맛보다 향으로 승부하는 느낌이 강했다. 젤라또가 수많은 가짓수 중에 고를 수 있다면 썬데이 아이스크림은 수도꼭지 기계에서 나오는 한 가지 맛만 먹을 수 있다. 골라먹는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가성비와 가양비(필자의 말: 가격대비 양)는 젤라또보다 우위에 있다.
제대로 한 컵 담아주면 10~20분은 앉아서 잡생각을 하며 충분히 시간을 때울 수 있다.
망고 냄새도 어느 정도 맡을 수 있고 맛도 달달하니 입술에 닿는 차갑고 부드러운 느낌도 어느 아이스크림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는다.
2주 남짓한 할인 기간 동안 세 번을 사 먹었다.
또 다른 디저트 프랜차이즈 매장 앞을 지나는데 이탈리아에서 본 젤라또와 비슷한 모양으로 스쿱으로 둥글게 떠서 컵에 담아 놓은 사진을 마주쳤다.
사진만 봐도 쫀득해 보이며 종류도 여러 가지다. 광고지에는 ‘이탈리아의 맛 그대로’라고 쓰여있다.
가격은 4900원. 저 둥근 덩어리 하나가 썬데이 아이스크림보다 3000원이 비싸다.
이탈리아 거리에 멈춰 선 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가게 앞에 정지했다.
먹을까 말까.
어느새 우리나라에서 파는 젤라또 가격도 그 시절 낯선 이국 땅 높은 물가를 따라잡았다.
게다가 같은 가격으로 먹을 수 있는 대안도 많다. 고물가에 다양한 디저트가 쏟아져 나온다. 눈앞에 있는 젤라또의 녹진한 맛을 느낄 것인가 커피나 음료 등 다른 대안을 택할 것인가. 지금 망설이는 이유는 정말 먹고 싶어서인가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에서 원 없이 먹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인가.
썬데이아이스크림은 먹고 싶을 때마다 들어가서 사 먹었지만 아무래도 젤라또는 힘들다. 주저 없이 들어가기엔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그래 오늘은 참아보자.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간다.
매일 지나가는 길목에 디저트 매장 광고지는 날마다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탈리아의 맛 그대로’
오늘은 먹자!
이따가 도서관 가는 길에 지날 때는 문구를 읽지 않고 들어갈 것이다.
쇼윈도 앞에 멈춰 서지 않고 문을 밀고 카운터로 직행할 것이다.
순간 떠오르는 다른 디저트와 비교하는 머릿속 계산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대학생 때 이탈리아에 처음 온 배낭여행객처럼 신세계 맛을 다시 느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