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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Aug 11. 2023

시험관 3차

그냥 걷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무더위가 계속된다. 땡볕에 양산을 쓰고 걷고 또 걸었다. 일어나자마자 운동장 트랙 4킬로미터를 걸었고 오전에는 국립박물관에 갔다. 3층 높이 건물을 구석구석 걸으며 다리가 아프도록 돌아다녔다. 어제는 광명동굴에 갔고 내일은 DDP에 갈 것이다. 걸을 일이 많은 장소만 골라서 가야겠다. 그래야 몸이 힘들어져 정신을 마비시킨다. 지쳐 잠들어야 밤에 푹 자고 어수선한 생각을 안 할 수 있다.


글 업로드가 뜸했던 동안 시험관 3차 시술을 했다.

한 번 했을 땐 이식을 하지 못했고, 두 번째 했을 땐 유산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이식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바로 이식하는 대신 수정란을 배양한 배아 세포를 떼어내서 염색체 검사를 보내는 PGT-A검사를 하겠다고 했다. 이 검사를 하려면 수정란이 아주 어려운 여정을 떠나야 한다. 모체가 아닌 연구실 배양 환경에서 5일을 버텨야 하며 시기에 맞게 정상적인 상태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세포가 견디기에 쉽지 않은 환경이다. 세포도 크기가 아주 작은데 그 상태에서 더 미세하게 검체를 떼어내서 검사를 보내야 한다. 검사에 통과할 확률은 나이가 많을수록 낮다.


이전에 겪었던 유산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다. 유산 후에 정신적 신체적으로 무척 고생을 해서 고민하지 않고 택했다.


유산 후 회복 기간 중 했던 몇 가지 혈액 검사 결과는 가혹했다.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하고, 한약을 먹었다. 임신에 도움이 된다는 영양제를 다 챙겨 먹고 우유, 두유, 견과류, 소고기를 매일 먹었다. 그야말로 몸에 좋다는 걸 융단 폭격 하듯 쏟아부었다. 생활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잠자는 시간과 기상 시간을 철저하게 지켰다. 청소년기에도 이렇게 살아보지 않았다. 마흔이 넘어 이런 생활을 한다는 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다.


시술을 위해 사전에 해놓은 검사 결과는 다리가 후들거리게 만들었다. 난소 나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실제 나이보다 젊다고 나왔던 난소 기능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왜 이러지? 사는 동안 이보다 열심히 운동하고 몸 관리 한 적이 없는데. 기분상태는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롤러코스터 도입부에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험관 시술에서 첫날 본 예비 난포 개수는 하락하는 롤러코스터를 더욱 아래로 추락시켰다. 시험관 2차 때보다 난포 개수가 1/3로 줄어 있었고, 불과 3개월 전에 본 초음파에서보다 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번 굴욕을 맛보았다. 유산 직후에는 기능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대체 이유가 뭘까. 불과 2개월 사이인데…


점점 힘이 없어지는 나날이다. 정신에 충격을 받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 잘 걷지 못한다. 한 동안 그랬다. 간신히 정신줄 부여잡고 두 번째 방문을 했다. 다소 희망적이었다. 약효가 잘 들었는지 난포가 더 보였다. 약 용량을 두 배로 늘렸다. 더 키워야 한다. 그다음 방문과 또 그다음 방문에서도 난포가 더 보였다. 아래로 향하던 롤러코스터는 상승 선로를 올라가고 있었다. 기분이 점점 나아진다.


이대로만 가면 나쁘지 않다. 드디어 채취 날이다. 채취 난자 수 6개. 꽤나 성공적이다. 이틀이 지나면 수정란 개수를 알 수 있다. 롤러코스터 위치가 최정점을 찍었다. 그래도 의료 처치를 하는 대로 몸 기능이 잘 반응해 주는구나.


기분 좋은 이틀이 지나 수정란 개수가 떴다. 난자와 정자가 얼마나 잘 만났을까. 결과는 두 개. 처참하다. 상승 선로를 탔던 롤러코스터가 순식간에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알고 보니 3개는 성숙한 난자였고, 3개는 미성숙한 난자였다. PGT-A검사를 보내기 위해 최대한 많이 채취했다. 미성숙한 것 중 1개가 연구실 배양 환경에서 성숙 난자로 발달해서 총 4개 난자를 체외수정 시도했다. 이 중 정상 수정된 것은 두 개라고 한다. 별로 좋지 않은 수정률이다. 기분이 꼬꾸라질 거 같다.


두 개라도 잘 살아남아라. 체외에서 5일을 버텨야 검사 보낼 수 있다. 이 검사를 통과해야만 내 몸에 이식할 수 있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어낼 때 살아 있는 동안 무한히 임신할 수 있게 만들지 않았다. 젊은 날 대체 뭘 했단 말인가. 자책감이 밀려왔다. 난소에 좋지 않은 자책감과 우울함. 난임 전문 의사도 난소 기능에 제일 안 좋다고 말하는 부정적인 생각에 휘말리는 시간을 며칠간 보냈다.


검사 한 번 시술 한 번 할 때마다 롤러코스터 타듯 오르내리는 멘탈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생각이 정리될 틈도 없이 그냥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날씨가 더우니 야외에서는 아침에만 걷고 주로 박물관, 미술관, 전시장, 동굴 등을 걸었다. 다리가 아프고 몸이 힘드니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2023년 7월 20일부터 불볕더위 속에 엄청난 양을 걸었다. 등산도 몇 번 다녀왔다. 몸을 힘들게 해서 정신을 마비시켜야 했다.


밤에는 잠이 쏟아졌다. 몸이 힘드니까 당연한 현상이다. 시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긍정적인 생각이 들만한 시기도 아니다. 부정적인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5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PGT검사에 보낸 배아가 있는지 병원으로 문의했다.

그때 의사가 했던 설명을 그대로 옮겨 본다.


“수정란 한 개가 4일째 상태인 상실배까지 잘 발달했으나 5일째 배반포 단계로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든 5일째 배아 모양이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검사를 보내보려고 하루를 더 두고 보았으나 상실배에서 더 이상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수정란 한 개는 8세 포기에서 분열을 멈추었습니다.”


배반포라는 단계가 되어야 검체를 떼어낼 수 있는 세포 모양이 만들어진다. 이 단계로 가기 하루 전 상태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또 다리가 떨린다. 백화점 휴게 의자에 앉아 전화로 설명을 들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지지가 않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만 눈에 들어온다. 그녀들의 가임력이 부럽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밥 먹으러 갈 힘도 없다.


그렇게 정신이 탈탈 털린 나날을 보내다가 걷게 된 것이다. 가임력이 왕성하던 시절인 23살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매일 다리가 아파 밤이면 곯아떨어지던 그때를 생각했다.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까 고민해 보러 떠난 유럽 여행이었다. 선진국을 구경하고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미래를 정리해보고자 했다. 설렘으로 떠난 유럽 대륙은 연일 40도를 오르내리는 유례없는 폭염으로 펄펄 끓었다. 덥고 힘들어 미래는커녕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 날씨와 비슷했다. 몸이 힘들어 생각을 마비시켰던 그때로 돌아가야겠다. 그래서 걸었다.


20일 정도 걸었다. 그리고 8월 8일 오늘 마침내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하루에 소설책 한 권은 거뜬히 읽는 집중력이었는데 3차 시험관 이후로 책도 글도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걷기의 힘이었는지 시간이 치유해 주었는지 오랜만에 키보드를 잡았다. 나아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책감과 괴로움에서는 벗어났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감사하다. 시술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약이 잘 들어서 감사하다. 난포가 자라고 있어 감사하다. 제 기능을 다 해주고 있는 내 몸에 감사하다. 회복해주고 있어 감사하다. 부족이라고 나왔던 비타민D 수치가 영양제 복용으로 정상 수치로 올라섰다. 다른 좋은 영양소들도 잘 흡수 됐겠지. 힘든 길 같이 가주는 남편에게 가장 고맙고 고맙다.


뛰어난 의료 기술도 어떠한 약으로도 완벽하게 맞출 수 없는 몸의 미세한 기능 조절을 스스로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내 몸을 믿는다. 몸이 스스로 회복할 시간을 주고 또 시술을 하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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