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출혈
처서가 지나면 선선해진다는 나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8월 23일을 기점으로 무더위가 사그라드는 걸 보고 내린 지론이다. 또한 23일이면 팔월도 말경에 해당하는 날이어서 하절기가 끝나가는 한 해의 후반부로 접어든다. 한 해가 가고 있다는 뜻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가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한 풀 꺾인 더위를 맛보기 위해 기다리기도 하면서 하는 일 없이 날짜만 가는 게 아쉬운 날이기도 했다. 적어도 예전에는.
지금은 이 날짜가 오면 아쉬움을 넘어 조마조마하다. 아기를 가져야 하는데 해가 또 바뀐다면 두려울 지경이다. 한 살 더 먹는다고 생각하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시험관을 한 차수 하면 생리가 빨리 온다. 약을 썼기 때문에 호르몬 변화가 와서 그렇다고 한다. 12일 만에 시작한 생리는 잘 끝났고 그다음 주기 생리를 기다려한다. 그래야 다시 시험관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험관 후 첫 생리 후 무려 11일 만에 또 생리를 했다. 영락없는 부정출혈이다. 시험관 했던 주치의는 과배란으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인 것 같으니 지켜보라고 했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정상적으로 몸이 작동해 주었으면 이번주 말쯤에 병원에 가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주기에 변동이 왔기 때문이다.
장마가 끝나는 7월 셋 째 주부터 무더위가 시작됐다. 3차 시험관 했던 기간 내내 병원 갈 때마다 쫄딱 비가 내렸으니 잘 기억한다. 낮기온이 33도 이상 올라가는 폭염이 3주 동안 절정에 달했다. 비 한 번 오지 않던 이 날씨는 잼버리를 지속 하네마네 폐영식을 서울에서 하네 전주에서 하네 옥신각신 하는 동안 이틀간 폭우가 쏟아졌다. 이 비를 기점으로 30도 정도로 한낮 기온이 내려갔다. 이때부터 불안 불안하다. 날씨가 꺾이면 날짜가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날짜가 간다는 건 후반부로 치닫고 있다는 뜻이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무더위가 가시고 있나로 자각한 건 중학교 때부터다. 어마어마했던 1993년 폭염. 그때부터 8월 23일이라는 날짜가 주관적인 기점이 되었다. 물론 9월이 돼도 낮에는 덥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그리고 아침 해가 조금씩 늦게 뜨고 저녁 해가 빨리 진다. 그렇다 해도 한낮에 30도 이상 올라가는 날씨는 한동안 지속된다. 무더위에서 가을이 되어 가고 있는 현상은 어느 날 휙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하루 중 한낮 기온이 30도 이상 올라가는 시간이 짧아지고 해가 떠있어서 밝은 시간이 줄어드는 걸 보고 알아간다. 지금이 한낮 기온이 30도 이상 지속되는 시간과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딱 그 시점이다.
쓸쓸하다. 나는 저 부정출혈로 병원을 두 군데나 갔다. 물혹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두 병원 모두에서 물혹이 있으면 다음 생리까지 시험관을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는데 시험관을 또 쉬란다. 올해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유산 후 4개월이나 쉬었던 게 내심 아쉽다. 이런 이변이 일어날 줄 모르고 한 달 건너 한 번씩 시험관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
당장 할 수 있는 건 책 읽기와 다음 생리 날짜를 기다리는 일이다. 다행인 건 책이 다시 손에 잡힌다는 것이다. 책도 읽어지고 글도 써진다. 그마저도 안되던 3차 시험관 직후보다 심리 상태가 안정적이다. 병원에서 물혹을 유발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양제 하나를 끊으라고 한다. 난자질 향상에 도움이 된 데서 10만 원이나 주고 산 영양제를 끊었다. 구매한 지 얼마 안돼서 남기도 많이 남았다. 몸을 위해 쏟아부은 몇 가지 방법이 오히려 독이 되었나.
조금함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함이 엄습하는 와중에 기다림이란 참 지난한 일이다. 호르몬이 정상화될 때 시험관을 재개해야 한다. 정신력 관리도 해야 한다. 어제는 음력 7월 칠석이었다. 물 한 사발 떠다 놓고 부부가 므흣한 밤을 보내면 애가 잘 들어선다고 한다. 음력 칠석을 그런 날이라고 하는 걸 보니 견우직녀 설화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근데 호르몬이 뒤틀리는 바람에 이제 생리가 끝났는걸… 난포가 제대로 성숙할 시간이 없었을 텐데. 수정이 잘 될까. 이런 생각이 앞선다. 믿으셔야 합니다 믿어야만 합니다 꼭 믿어야 된다는 말을 새기고 또 새기는데도 이렇다.
출혈도 있고 물혹도 있지만 단 한 가지 반드시 믿어야 한다.
나는 곧 엄마가 된다.
건강한 아기가 태어난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써놓으라는 끌어당김의 법칙.
이렇게 한 줄 써놓는다.
2024년 7월 31일 출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