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순번 20]
어떤 병에 대해 환자가 알게 되는 정보량이 난임보다 많은 질환이 또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먼저 난임 환자는 신체 상태가 멀쩡하다.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어 병시중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증 환자도 아니다.
정상 생활이 너무 가능한 사람이기에 움직이고 활동하고 탐색하고 물어볼 수 있다.
병에 걸렸을 때 제일 먼저 주변에 수소문해서 어디 사는 누구가 같은 병을 앓았는데, 어느 병원에 명의가 있다 하면 부랴부랴 그 병원에 전화를 걸어 진료 예약을 잡는다.
난임은 이 부분이 다른 질병과 다르다.
도무지 주변에 누가 시험관으로 임신하고 출산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난임 병원에 다녔던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가 무척 어렵다. 건강하게 출산했으면 그거면 된 것이지 “나 시험관으로 애 가졌었어.”라고 공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바로 난임입니다.”라고 소문을 퍼뜨리기도 아주 껄끄럽다.
일말의 가능한 방법이 있다. 결혼하기 전부터 “쟤 큰 일났다 올해 마흔이 넘었대. 만나는 사람은 있다니?”라며 어르신들 걱정을 온몸으로 방어한다. 뒤늦게 혼인이라는 거사를 치르고 임신한 사람. “요즘 다 늦게해”라는 말로 한 두 해 멘탈은 지켜낼 수 있어도, 그 시기가 몇 년을 훌쩍 넘기며 되레 결혼하라는 잔소리마저 서서히 사라져 간다. 그럴 때 결혼한 ‘아는 언니’ ‘아는 오빠’들 임신 소식을 접하면 슬며시 묻게 된다.
“혹시… 시험관 했어요?”
난임이라는 길을 걷는 대부분, 아니 모두가, ‘시간’ 앞에서 쩔쩔매고 조급해진다.
빠른 시간 안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난임은 나이 앞에서 무조건 무릎 꿇어야지 절대 대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앞서 말한 신체 기능이 정상인 이가 나이라는 통제 불가한 조건을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일. 열심히 검색해서 최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난임 환자들이 ‘자신과 같은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경로를 통해 검사, 진료 등을 알아보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시각도 있다. 그렇지만 어쩌나. 나이라는 절대 조건 앞에 하루라도 빨리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는 어려운 처지다.
게다가 주변에 알리지도 못하는 상황을 어루만져 본다면 자판을 두드려 검색해 보는 심정이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지 않을까. 이들도 최종 판단은 자신이 선택하고 또 자신을 책임지는 의료진을 따른다. 웹상에서 만난 다수는 나를 복제해 낸 도플갱어가 아니니까. 나와 똑같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며 검색은 어디까지나 검색일 뿐이다.
난임 여성들이 주로 찾아보는 건 병원 시스템과 의사 성향 정도일 것이다.
요즘 어느 병원을 가든 첨단 기술을 갖추고 있지만 그 시스템을 이용하기에 나에게 편한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상태를 잘 아는 이들은 본인에게 필요한 장비가 있는지도 살펴본다. 이게 다 인터넷을 뒤적여보면 잘 나와있다.
비단 물리적인 요소뿐일까. 병원에 방문할 때마다 뭔가 마음이 불편하다면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소위 ‘짝짜꿍’이 잘 맞는 친구를 사귀어야 잘 지낸다고 심리적으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코드가 맞는’ 의료진도 찾아본다. 의료진에는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 연구원도 포함한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일 잘하는 병원은 난임 환자들 사이에 간호사 이름까지 회자되기도 한다.
계류유산으로 끝난 시험관 2차 결과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있다.
“착상전유전자검사를 해야 해요.”
이 검사는 이식을 했던 의사도 아주 강하게 권했고,
이후 태아염색체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타 병원에 상담을 갔을 때도
태아염색체검사 결과지를 들고 상담을 간 병원에서도
동일하게 말했다.
모두 ”이렇게 되면 PGT검사를 해야 된다.“라고 한다.
유산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기에 이건 분명해야 하는 것이 자명하다.
정신세계는 많이 피폐해졌지만 그래도 힘을 내서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상담을 다녀보면 병원마다 컬러가 있다. 고유의 특색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병원이 색깔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병원은 개원 연차가 오래되지 않아 내부가 온통 하얗다 못해 눈부실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직원들 착용한 유니폼도 새 옷 티가 나고 명찰이며 인테리어 소품들도 반짝거린다. 이런 병원은 몽실몽실한 하얀 구름처럼 흰색으로 가득 차 있다.
또 어떤 곳은 워낙 역사가 깊고 연혁이 훌륭하여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시설도 낡아 흑갈색 내지는 회색빛을 띠는 곳도 있다. 컬러감이 다소 어두워도 그 명성을 보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예약을 해도 대기하는 시간만 무려 3~4시간에 육박한다. 조신히 기다리고 있지만 2시간을 족히 넘어가면 내 눈앞도 캄캄해질 지경이다.
또 어떤 병원은 하늘을 찌를 듯 마천루가 즐비한 대로변에 병원이라고는 있을 것 같이 않은 오피스 빌딩 중간쯤 어느 층에 입주해 있다.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는 순간부터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곳에 일하러 오는 게 아니라 진료를 받으러 오다니! 쏟아질 듯 타고 내리는 정장차림 직장인들 틈에 흰색 스니커즈 신고 입고 벗기 편한 스커트나 스파브랜드에서 중저가에 장만한 바지를 입고 구석에 비집고 들어가 거울에 비춰본다. 이럴 때는 일상의 색깔 눈에 편안한 옐로나 병원 가득 자라고 있는 녹색 식물들 때문인지 그린 계열로 보인다.
어디로 가면 예쁜 아가를 만들어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병원을 정한다.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이게 난임 여성들 마음이리라.
이제 자연임신이 가능하다면 해 볼 일 없었을 착상 전 배아 유전자 검사를 할 계획으로 병원을 찾는다. 난임 치료라는 게 잘 될 거란 예감에 한 없이 좋아지다가도 어느 때는 기분이 곤두박질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멘탈을 잘 붙들고 있으려면 성향이 잘 맞고 믿음이 가고 다니기 수월한 병원을 찾아야 한다.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나면 들은 내용을 하나씩 써놓는다. 여기에 이번에 꼭 된다는 마음으로 한 줄 더 수첩에 적어 본다. 나는 곧 엄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