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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Sep 03. 2023

나의 생일, 아이를 위한 기도

Praying for me

마흔네 번째 생일이다. 이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선선해져 가는 날씨를 밀어내려고 했다. 한낮 기온이 정점에 달하는 시간이 짧아지지 않기를 빌었다. 오후 8시가 넘어도 해가 떠 있어 일상 활동이 가능한 날이 계속되기를 바랬다. 낮이 길고 덥고 밤이 짧은 여름에서 더 이상 날이 흘러가지 않기를 바랬다. 폭염이 힘들고 더위를 무척이나 타는 나인데.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어김없이 낙엽이 하나씩 밟히는 초가을에 진입했다. 그리고 내 생일이다. 만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원망


아이 생기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달으며 주변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배우자를 늦게 만난 나에 대한 죄책감

(얼마나 남자 보는 눈이 없었으면 나이 사십이 되어서 남편을 만났을까.)


의료진에 대해

건강하지 못한 배아를 이식한 의사에 대한 원망

(설명 좀 잘해주지 왜 유산을 유발해 가지고)


수태 기능이 오히려 떨어지게 된 후 한약 처방 의사에 대한 원망

(아니 왜 약을 먹었는데 난소 기능 수치가 떨어진거야?)


어린 시절에 대해

감정을 잘 다뤄주고 수용해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

(그때 내 마음을 잘 어루만져줬으면 인생에 큰 터닝 포인트마다 힘들이지 않고 겪어냈을까)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교사에 대한 원망

(이건 정말 증오심을 품을만하다)


배우자에 대해

더 빨리 병원에 가주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

(늦은 나이에 만났는데 바로 병원에 갔으면 기회가 더 많았을 텐데)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동안 너무 힘들었다. 부당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원망 하는 마음이 생길 수는 있으나 날마다 매시간 깨어있는 동안 이런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면. 원망당하는 사람은 누가 자기를 원망하는 줄도 모르는데 나는 무척 힘들다.


저런 일들이 반대로 일어났으면 나는 취업에 더 빨리 성공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빨리 이성을 만나 결혼해서 이른 나이에 아이를 낳았을까?


좀 더 도움은 됐겠지만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무언가를 원망하고 싶어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을 잡아 원망해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 기댈 곳이 생겼다.


그런데,,,

원망을 하는 동안 더 힘들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폭력을 휘두른 교사를 고소고발 했을 텐데. 학교, 취업에 매몰되기보다 더 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을 텐데… 일에 매달리기보다 남자를 만나는데 에너지를 더 썼을 텐데.


이것이 되었을까?

지금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학생들을 개 패듯 패던 폭력 교사를 응징하는 일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건 확실한 처벌을 받게 해야 했다.


1970년대 합계 출산율이 4.5명이었다고 한다. 이 수치가 50년 만에 나라 전체 0.7, 서울시는 0.59로 하락했다. 1970년부터 50년이라는 시간 동안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 이후 나라 재건을 위해 풍부한 일자리가 공급되면서 수많은 남성들이 변변한 직장을 얻게 됐다. 일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하며 아빠는 일, 엄마는 가사라는 공식이 형성됐다. 취직으로 일을 하게 된 남성들은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다. 전쟁 이후 태어난 이 시대 엄마들은 먹고살기 궁핍한 시절 그녀들의 어머니에 의해 돈벌이를 시작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나가서 돈 벌어 오라며 공장이든 어디든 일이 있는 곳으로 떠나야 했다. 동생들 그중에도 남동생 공부 시켜야 한다며 특히 맏이 여자 아이들이 일터로 내몰렸다.


그렇게 사회에서 각자의 일을 하며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뤘다. 결혼하여 출산한 여자들은 드디어 일에서 벗어났다. 여자가 결혼하며 일은 그만두는 것이 당연하고, 기혼 여자는 대개 취업시켜주지 않는 때였다. 남편 월급으로만 생활하려니 팍팍하긴 했지만 자신들이 겪었던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던 삶만큼은 딸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공교육을 철저하게 시켰고 입시 경쟁도 만들었다. 어린 시절 그들이 겪은 지독한 가난도 대물림 되지 않았다. 밥을 굶기지 않았고 먹고 공부하는 데는 아낌없이 자녀들에게 쏟아부었다.


형편이 별로 넉넉하지 못한 서민 가정에서는 돈을 벌어오는 주체인 남편이 집안의 가장이었다. 겉으로 나타난 형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따금 아내가 쓰는 식료품비며 의류 구입비 등 생활비에 간섭하곤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은 면했지만 화려한 부자도 아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생활비를 쩨쩨하게 주거나 늘상 주던 돈을 깎거나 안 주겠다고 하며 아내들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럴수록 엄마들은 딸들에게 너만큼은 이다음에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사회에 나가서 큰돈도 벌라며 교육에 철저하게 매진했다. 사회에 나가서 직업인으로서 꿈을 펼치는 일이 여성성보다 우선시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기업들은 여성 직원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남자 사원틈에 섞여 한 두 명 뽑던 여성 비율이 남자들과 비등하게 올라갔다. 시간이 갈수록 대학 졸업한 여자 사원을 더 많이 뽑았고 학벌은 석사, 박사, 유학파까지 갈수록 높아졌다.


사회에서 발휘하는 능력도 대단했다. 남자들과 비교해서 절대 처지지 않을 정도로 일 했고 어떤 분야에서는 여성의 성과가 훨씬 좋았다. 기업들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여자들도 남자처럼 일하는 시대임을 새해 인사말에서, 직원 워크숍에서, 크고 작은 회식 자리에서 셀 수 없이 세뇌시켰다. 사회에서 인정받을수록 일에 더욱 빠져들었고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확신했다.


남녀 할 것 없이 치열하게 일한 결과 나라를 다시 세웠고 K 문화를 창조하여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기염을 토했다. 자원도 부족하고 침략과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이렇다 할 관광자원도 없는 나라다. 오로지 사람이 일해서 벌어먹는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충실히 이를 해냈다.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일했다. 모두 사람의 머리와 심장으로 이루어냈다.


그리고


출산율은 바닥을 쳤다.


4.5에서 0.7이라는 숫자로 내리 꽂히는 동안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중요성은 언급이 없었다. 나라에서도 개인 간에도. 수태 능력은 사망할 때까지 활성화되는 것이 아님을 누구도 입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성들의 실력과 근성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본 이들이 그들을 계속 활용하고 싶었다. 가임 능력이 가장 높은 시기인 20, 30대 여자. 그 시기의 미모와 팽팽 돌아가는 머리를 경제 활동에 쓰고 싶었다.


그렇게 돈을 벌어 부를 축적하고 나라를 재건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임신 출산에 현금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출산율을 높일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백화점식 정책을 펼치는 경우는 구조적인 문제를 도저히 바꿀 수 없을 때 뭐든 맞는 거 하나라도 취사선택하라는 의미다.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출산율은 변동이 없거나 감소할 것이라는 걸 이 사회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사회구조를 바꾸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둘 것이다. 왜냐면 이 상태로 돈을 벌어보았기 때문이다.


기업에게 여성의 출산을 장려하는 교육을 전 직원 대상 반복적으로 실시하고,

학교에서 35세, 40세를 기점으로 가임 능력이 떨어진다는 걸 가르쳐 수능시험 문제로 출제하고,

시험관과 난임 치료 부부의 힘든 과정을 공익광고로 내보내라고 하면


과연 할 주체가 있는가?


만 3세까지는 의무적으로 부모가 공동 양육하도록 남녀 휴직을 법으로 강제하고,

3세 이후부터는 국가가 운영하는 양육 기관에 부족함 없이 맡길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가?

아이가 아프면 일보다 아이에게 먼저 갈 수 있도록 생각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렇지 않기 때문에 출산율 하락은 이제껏 논리에 맞는 결과물인 셈이다.


몇 푼 돈은 손에 쥐어지겠지만 아이가 태어난 세상도 여기서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겪었던 입시 전쟁을, 취업난을, 늦어지는 결혼시기를 아이도 고스란히 보게 될 텐데. 끼워 맞추고 끼워 맞추는 세상에 자신을 욱여넣을 텐데.


나이가 많은 고령 부모여서 아무리 아이의 미래를 준비해 놓았다 해도 삶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디 이민 가서 살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치열한 삶은 살아야 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려고 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아이도 노력할 것이다. 난포 세포로 존재하는 배아 전구물질도 모체의 경험을 안다. 나와 아이가 합심해서 노력해야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원망할수록 힘들어지는 마음을 아주 조금 벗어났다. 아픔은 겪고 있지만 단지 나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다. 사회와 개인이 비등 비등한 대가로 겪고 있는 어려움이다.


난임에서 해방되는 날 몸 관리를 위해 금기했던 음식들 다 먹어볼 것이다. 기름과 당분이 안 좋다고 해서 안 먹고 있는 도너츠와 과일을 듬뿍 먹겠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난자를 거리낌 없이 배란시켜 버린 지난 몇 십 년을 아쉬워해야지 한 두해 늦게 만난 배우자를 원망할 일이 아니다. 태어날 아이는 태어나기 위해 같이 노력할 것이다.


개인의 잘못도 있지만 사회 구조적 문제도 분명 있다.

모체가 겪은 힘든 세상을 난포 세포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태어나고자 한다면 아이도 세상에 나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요란한 심리 변화 끝에 이런 글이 나왔다. 심각한 우울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사무치게 원망도 하고, 죽도록 후회되고, 미친 듯이 자책감이 밀려오고, 그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초연하게 독서를 하기도 하고, 신나는 일을 찾아 재밌는 상태를 일부러 만들기도 했다. 대부분은 우울하고 상심해 있는 날들이 많았다.


글로 표현하고 나니까 좀 낫다.

생일날 이런 생각이 난 것도 우연은 아닐 테다. 어떤 울림과 공명이 내게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생일이 다가오는 동안은 무척 힘들었는데 막상 생일날이 되니까 이런 생각이 쏟아져 나온다.

마음도 가라앉았고 훗날 지금처럼 힘든 마음이 불쑥 올라왔을 때 다시 이 글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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