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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Oct 30. 2023

난임 환자의 오사카 여행(6)

깊은 친절(1)

신오사카역까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난바에서 신오사카는 같은 전철 노선에 있는 역들이라 갈아타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없이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다. 신칸센도 오는 역이라고 하니 무척 클 것이다. 거기서 못다 한 쇼핑을 마저 하자.

메트로 개찰구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에 띈 건 선물용 과자류를 파는 면세점이었다. 사방이 뚫린 면세점 메인 입구 앞에는 A4용지 가로 크기만 한 피켓을 든 여자가 좌우 대각선 방향으로 번갈아 흔들며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읽을 줄도 모르고 읽을 것도 없을 거라 생각되는 피켓으로 보여 본체만체하고 매장으로 들어갔다.


매장 안에는 엄청난 양의 화과자, 카스텔라, 초콜릿류 등이 있었고 군데군데 서있는 판매 사원들은 환한 미소를 띠며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이 맡은 상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설명한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매대 위에 올려져 있는 상품 소개를 봐도 까막눈일 따름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런 것도 구글번역 앱을 이용하면 카메라 기능을 사용해서 번역할 수 있다. 그런 준비도 미비한 상태라 무슨 과자인지 알지 못해서 못 고르고 있었다.


출국하기 전 남편이 자기 선물은 양갱을 사 오라고 한 상태라 양갱을 찾긴 찾아야 한다. 과자나 빵 같이 생긴 건 많아도 양갱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읽을 줄 몰라 답답해하는 눈으로 하나하나 보고 다녔다. 초콜릿류 스킵, 오징어 문어 가공류 생략, 부스러지는 과자류 건너뛰기. 이런 식으로 제외하며 다니다 보니 어느새 양갱으로 의심되는 것 앞에 서있었다. 이건 양갱이 맞을까. 한지 같은 것으로 쌓여 있는 포장지에는 한문으로 한 글자 적혀 있었다. 역삼각형 모양이  전통적인 느낌을 풍기는 게 양갱일 것도 같아 다른 상품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직원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역시 판매 담당 여사원이라 파파고 번역을 이용해 물어본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웃음을 띠며 상냥하게 답해도 못 알아듣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이크에 대고 말해달라고 하자 기꺼이 뜻을 받아들였고 파파고는 ‘밤이 들어간 양갱입니다’라는 통역을 해주었다. 한 상자 집어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비록 총구매액이 면세 하한선을 넘기지 못해 세제 혜택은 받지 못했지만 남편 선물을 구입했다는 안도감이 들자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덤으로 이 역에는 도톤보리에도 있는 호라이551이라는 만두브랜드 지점이 있고 워낙 인기가 많아 대기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그럼 먹어봐야 한다. 다섯 끼를 먹기로 하지 않았나. 호텔 조식 후 요동치는 소장 대장 때문에 라멘 외에는 변변히 먹지도 못하고 돌아다니고 있지만 숙소에 가서라도 먹어야 한다는 일념에 기나긴 줄을 30분이나 기다려 만두 2개를 구입했다. 이로써 내 가방에는 그릇, 케이크, 가이드북, 머플러, 샌드위치, 푸딩, 오백미리 물 한 통에 만두와 양갱이 추가되었다. 한쪽으로 매는 가방이었고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가며 멘다 해도 치솟은 어깨뼈와 승모근은 내리누르는 먹을 것들과 소지품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고작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호텔방에 앉아 쉬고 싶었다. 아직 온천 입욕권도 사용하지 않았고 아침 9시에 먹을 라멘 외에 밖에서 먹은 음식이 없으니 아무리 속이 불편한 채로 돌아다녔다 해도 음식 섭취가 필요한 시간이 되긴 했다. 스스로에게 내려준 식사 허락을 되새기며 역과 호텔을 왔다 갔다 하는 셔틀을 타러 나섰다.


2번 출구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용산역보다 큰 신오사카역에서 멋대로 셔틀 승차장을 찾아 나섰다간 길치에 방향치인 불쌍한 공간감각이 다리를 더 괴롭힐 것 같았다. 누군가 물어볼 사람을 찾아야 한다. 역사 내부를 돌고 돌다 눈에 들어온 이는 아까 양갱을 산 면세점 앞에서 상하 대각선 좌우로 피켓을 흔들고 있던 여자 직원이었다.


그녀는 양갱을 사서 나와 역사를 헤매고 있는 시간에도 여전히 피켓을 흔들고 있었고 자신의 호객으로 손님이 들어오는지 매장 자체가 풍기는 흡인력으로 사람들 스스로 발걸음을 향하고 있는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지나가는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치면 생글생글 웃으며 더욱 열심히 피켓을 위로 올려 들었고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팬데믹에서 한차례 해방된 터라 눈코입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과 대조되게 코까지 덮은 마스크를 쓴 그녀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눈밑 애교 살이 접히고 풀리는 정도로 웃음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데다 눈이 작아지고 옆으로 찢어질 때마다 눈꼬리에 잡히는 잔주름으로 추측되게 하는 미소는 호의적이라는 마음을 더욱 굳히게 했다.


파파고에 한 번 더 의존했다. ‘2번 출구가 어디인가요?’라고 일본어로 써서 그녀에게 보여주자 그녀가 뭐라고 말했다. … 알아들을 수 없다. 갸웃갸웃 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자 ‘신칸센’이라는 말이 포함된 일본어로 한 번 더 내게 물었다.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파파고를 켜고 마이크를 갖다 대자 그녀의 의미를 알았다. ‘메트로 2번 출구인가요, 신칸센 2번 출구인가요?’ 오사카 전철이 엄청 복잡하다고 하더니 환승역 출구는 노선마다 번호가 있나 보구나. 그렇다면 메트로 2번 출구가 따로 있고, 신칸센 2번 출구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녀의 질문 의도를 깨달았다. 메트로라고 연속 두 번 그녀에게 화답하자 피켓을 품에 안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뒤에서 본 그녀는 155 정도 키에 통통하고 쇄골길이까지 오는 검정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피켓을 위아래로 흔드는 게 주된 업무인 그녀의 시간에 낯선 한국인을 뒤따라오게 하여 데리고 가는 길은 면세점 매장 우측으로 난 길을 걸어 신오사카역 메인 광장을 가로질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족히 100미터 이상 되어 보이는 길을 손수 데려다주는 동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가슴을 적셨다.


얼른 파파고를 꺼내 앱을 향해 말했다. ‘저로 인해 너무 고생하셨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에게 느낀 깊은 감동을 전달할 생각까지는 닿지 못했다. 그러기엔 호텔까지 사무치게 가고 싶었고 다리와 어깨가 뇌로 보내고 있는 통증은 다른 생각을 마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메트로 2번 출구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까지 도착한 피켓녀는 이 쪽이라며 오른손에는 피켓을 감싸들고 왼손으로는 출구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재빨리 파파고 화면을 보여주자 또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보던 눈은 금세 눈밑 애교 살을 만들어냈다. 글을 이해했다는 뜻으로 믿고 또 한 번 그 말을 했다. ‘아리가또고자이마쓰’


그녀가 화답했다. 마스크로 가려진 코와 입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눈으로만 알 수 있던 환한 웃음과 함께 ‘아리가또고자이마쓰’. 한국에서라면 손을 사용해서 저 길로 꺾어서 가다가 거기서 한 번 더 물어보세요라고 말했을 법한 길을 일손을 놓고 알려준 친절에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다. 우리나라를 지배했다는 오래된 관념에 휩싸여 40대가 되어서야 와본 일본에서 생각지 못한 친절을 경험했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싶었지만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누군가의 사진 촬영 요청에 불편한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부담 주지는 말자. 연신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가뿐 마음으로 셔틀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녀와 헤어짐을 나누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배고픔에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난 건 오후 5시로 향하는 시간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들어간다는 안도감과 하루 일정을 마친 달성감, 원하는 곳을 다 돌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교차였다.


이제부터 남은 시간은 먹는 일만 남았다. 실컷 먹은 후 온천에 갔다 와서 잠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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