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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Oct 31. 2023

난임환자의 오사카 여행(7)

깊은 친절(2)

자유 일정을 마치자 긴장이 약간 풀렸다. 이제부터 태워주는 버스 타고 가이드가 정해주는 시간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하니 몸도 마음도 가뿐하다.

전날 도톤보리에서 라멘, 쿠로몬 시장, 도구야스지 그릇 상가, 파크스백화점, 다이마루백화점을 다닐 수 있게 데려다준 다리와 발에게도 고맙다.


가이드는 87년생 여자이며 관광지에서 인파 속에 묻힐 때마다 철제 안테나 같은 것을 길게 늘여 하늘을 향해 올려 들었다. 안테나 위쪽 끝에는 빨간 사과 인형이 달려있어 뒤에 있는 사람들이 가이드가 어디쯤 있는지 식별할 수 있게 했다. 가이드가 이끄는 날은 제법 먼 곳으로 나갔고 일정 내내 그 인형을 보고 쫓아다녔다.


우리가 간 곳은 교토다. 거기서 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도게츠교 등을 둘러보고 청수사로 향한다. 교토에 오는 사람들이 필수 코스로 들르는 곳이라고 설명 들었다. 30명 남짓한 인원을 통솔하는 가이드는 앞으로 다닐 장소는 사람이 매우 많은 곳이니 삼삼오오 모인 일행 중 한 명은 자기에게 붙어 설명을 반드시 들으라고 했다. 실제로도 여행객이 매우 많아 가이드 뒤에 바짝 붙으려고 해도 좁은 골목과 밀려드는 인파는 가이드와 간격을 벌려놓곤 했다.


사과 인형을 따라 가이드를 놓치지 않게 애썼다. 도게츠교 인근 장소에 집합시킨 가이드는 아이스크림 쿠폰을 나눠준 후 오후 2시까지 이 장소로 모이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장소와 시간을 재차 주지 시킨 후 빨간 인형을 펼쳐 들고 대나무숲까지 향했다. 대나무가 가득한 곳에서부터 각자 자유시간을 누리라고 한다. 가는 내내 걸음 속도를 조절하는 건 불가능했고 다양한 나라에서 여행 온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보폭에 맞춰 걸어야 했다.


걷는 동안 결혼을 했고 아이는 없다는 점에서 나와 비슷하다는 가이드 개인 정보를 알아냈다. 그러한 이유로 아주 조금 친밀함을 느꼈다. 사람 만나 어울리기 좋아하고 계획이 어긋나고 이변이 생겨도 여차저차해나가는 것에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나와 반대 성향이다. 털끝만큼 비슷한 점을 찾아 친근감을 느낀 나와 다르게 그저 사람이 좋아 말벗을 찾아 혼자 온 나를 선택한 것일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가깝다는 감정을 느끼고 그녀는 수많은 모객 인원 중 한 사람과 대화한 것이고. 이것이 내가 사람과 관계 맺는 패턴이다. 나는 친하다고 느끼고. 상대는 내가 여러 사람 중 한 명일 뿐이고.


어쨌든 빨간 사과 인형을 들고 사교성이 좋으며 정해놓은 계획에 이슈가 생기는 일에도 잘 헤쳐나가가는 그녀는 사진을 찍어준다며 같이 다니자고 했다. 원래 여행 손님이 구경 다니는 일에 잘 관여하지 않으려 하지만 혼자 온 사람은 제법 챙긴다고 한다. 혼여객은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부연 설명도 붙였다.


가이드는 미처 내가 보지 못하는 숨은 장소도 찾아내주었다. 그중 한 곳이 게이샤 거리인데 게이샤들이 입고 다니는 화려한 옷 원단을 둘둘 말아 세워놓은 것 같은 알록달록한 기둥이 늘어 선 길이다. 바글거리는 인파에 비해 비교적 한산한 이유는 잘 모르면 사람들이 지나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어서인 것 같았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알고 순간 눈에 딱 들어와야 한다. 가이드의 안내로 오색찬란한 기둥 들을 뒤로 하고 사진 한 컷을 남길 수 있었다. 물론 가이드가 찍어준 것이다.


이럴 때는 팁이라도 줘야 하나. 1000엔 정도 줄 수 있는데 받으면 더 부담이 되려나. 여러 생각이 오간 건 이번 여행 가이드는 팁으로 수익을 내는 프리랜서가 아니라 여행사에 소속된 직원이라는 말을 들어서다. 모객인들로부터 팁을 받지 않아도 회사에서 나오는 월급으로 급여를 받는다고 한다. 큰돈을 벌 수 있는 구조는 아니라도 여행 온 사람들에게 쇼핑이니 옵션이니 닦달하지 않고도 생활비 충당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팁을 주면 오히려 관계가 어색해지지 않을까? 동시대 태어나고 처지도 비슷한 여자인데 부담되려나? 어쩌면 팁을 바라고 있으려나? 남편과 함께였다면 벌써 돈이 손에서 빠져나왔을 테지만 소심한 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게이샤 거리 외에도 예쁜 젓가락 받침을 팔고 있는 쇼품샵, 노노미야 신사 경내, 도게츠교 앞 잔잔한 물이 흘러가는 고즈넉한 길가, 대나무에 둘러싸인 숲 등에서 추가 사진을 찍어 주었다. 특히 노노미야 신사에 갔을 때는 해당 신사에서 비는 주요 기원은 새로운 인연 만나는 것이므로 임신 출산은 여기서 빌지 말고 청수사 가서 빌라는 조언도 주었다. 가이드와 붙어 있기에 알았지 한국에 물적 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남편을 두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어 자칫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팁 지급에 대한 마음속 갈등이 한 차례 더 일었다. 그러다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는 생각으로 점철된 건 교토에 오기 전 오사카 성에 들렀을 때 일본 소설에 반해 있는 현상태를 설명해 주었을 때를 떠올리면서부터다. 히가시노게이고 소설을 유독 많이 읽은 나는 가이드에게도 게이고 작품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박수를 치며 함박웃음을 짓고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며 일본 여행 가이드다운 답변을 주었다. 히가시노게이고 책을 떠올리며 크게 동조해 주었을 때 모습은 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더불어 재밌는 책을 추천해 달라며 나에게 연신 당부했다. 공항 등에서 여행객을 기다릴 때 읽을거리가 있었으면 한다는 책이 필요한 추가 이유를 설명했다.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하고 목록을 만들어 카톡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이로써 사진 촬영에 대한 팁을 상쇄시켰다. 무언가 보답에 대한 답례를 빚지지 않았다는 내적 갈등이 소실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남편이 알았다면 그건 그거고 팁은 팁대로 줬어야 한다는 말을 했겠지만 그만한 용기가 없는 나는 이 정도도 큰 일을 해낸 것이다.


어제에 이어 두 번째 깊은 친절을 경험했다. 신오사카역에서 찾고 있는 출구를 손수 데려다준 면세점 피켓녀부터 여행지를 같이 돌며 사진을 찍어준 여행 가이드로 인해 자신감이 한층 더 솟았다. 바보 같은 인생에 별 볼일 없다고 자학하고 있는 나에게 이토록 잘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세상은 살아봐야 알 일이라는 말이 맞는 건가.


이런 좋은 경험을 시켜준 남편에게도, 일본 사람들은 친절하다는 막연한 관념을 현실 체감하게 해 준 일본인에게도, 자기 손님에게 추억 하나 더 남겨주고자 사진 촬영을 자처한 가이드에게도 모두 고맙다. 다른 것보다 이들로 인해 좀 더 세상과 섞여봐도 되겠다 하는 적극성 있는 생각을 들게 한 건 중요한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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