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버반지 Nov 02. 2023

난임 환자의 오사카 여행(9)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3박 4일 오사카 여행은 타인 도움을 받지 않고 초밥을 사 먹으며, 두 차례 깊은 친절에 감사하고, 땡땡 부어 오는 다리를 이끌며 짤막한 일정을 마쳐가고 있었다. 울적한 기운을 안고 왔었다. 남들 보기엔 티도 안 났을 테지만 오랜만에 찾은 공항에서 어리숙한 모습과 어딘가 불순해 보이는 낡은 보조가방은 세련미를 올려주기는커녕 한층 끌어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 입지도 않던 앞 지퍼 올려 채우는 트레이닝복 윗옷을 목까지 단단히 여미면 영락없이 동네백수로 보인다며 남편에게 깔깔대고 웃던 복장을 거의 매일 하고 다녔다. 이쯤 되면 저 여자는 대체 어떤 연유로 혼자 왔을까 싶은 생각을 들게 하기 마련이다.


몇 안 되는 말 섞었던 사람 중 유일하게 가이드에게만 처지를 전달했다. 임신이 잘 안 되고 있고 아이가 무척 갖고 싶다고. 반딩크 반아이선호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가이드는 자신의 관념만큼인 딱 절반만 내 상태를 이해해 주었다. 어쩌면 새로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자 한 마음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유리잔에 물을 가득 채운만큼 이해받고 싶었지만 가이드의 신념이 전달할 수 있었던 반의반 정도 위로와 격려로 충족시켰으니 이 만하면 낯선 이를 통한 어느 정도 성공은 달성했다고 본다.


이 나이 되도록 아이도 못 낳는다는 생각에 자책하던 내가 타국에서 밥을 사 먹었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극진한 친절을 받았다. 울적해하고 고민과 시름에 빠진다고 과연 도움이 되는 상황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심적으로 나를 돕고 있는데 지금 현재의 나를 놓쳐서 되겠는가? 그토록 원하던 퇴사를 했고 업무라는 사회적 과중감에서 벗어났다. 예전에도 잠시 일을 안 하던 때가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수입 감소로 생활고에 쪼들려 살았다. 단기 수입이라도 벌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곤 했다.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남편이 필요한 돈을 지급하고 있고 함께 소비하는 활동도 오로지 남편이 부담한다. 생활비 외에 의류 구입이나 여행비용도 제공해 준다. 매일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며 시험관 하러 병원에만 가면 된다. 앞으로 방향을 정하기 위해 같이 의논해 준다. 정말 고민할 게 없는 삶 아닌가?


난임은 병이 아니라 몸이 늙어가는 노화 과정이라고 한다. 약해진 생식 능력을 의학 처치를 해서 주어진 시간 안에 임신하고 출산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해당 내용은 국내 최초 시험관 아기 성공시킨 문신용 박사님 블로그에서 보고 인용했습니다.)

몸의 자연스러운 현상을 - 물론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에 조급하고 지난날들엔 무얼 했는지 한탄스럽기도 하다 - 눈물과 아픔의 나날로 지샌다고 될 일인가? 의료 시술을 받고 있으니 ‘난임 환자’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제로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다니지는 않는다. 좀 더 정신을 깨고 몸이 생애 주기 어디쯤 와있는지 이해하면서 의학과 함께 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게 올바르지 않은가.


오사카에 다녀온 후 많은 생각을 했다. 일찍 아이를 가져 낳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유능한 남편을 만났고 다만 그 시간이 늦었지만 이 부분은 진심 어린 대화 끝에 우리에겐 우리가 만났던 그때가 운명이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0년 전에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여러 여건이 밀어붙여주지 못해 실행으로 못 옮긴 난자냉동이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


결론은 우울할 게 하나도 없다는 뜻에 닿는다. 내가 왜? 잘못한 것도 없는데? 피해 준 것도 아닌데? 혼자 울적하고 속상해한단 말인가. 이따금 마음을 흐리는 불온한 생각이 떠오르면 독서로 눌러버리자. 세상엔 수없이 많은 책이 나와 있다. 이들을 읽고 있으면 재미도 있고 글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사회성 없는 히키코모리라는 눈빛으로 바라봐도 어쩔 수 없다. 편 가르기와 집단 내 정치에 익숙한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일부 인간들의 자격지심이라 치부해 버리자.


이러면 될 일 아닌가? 적은 액수라도 돈을 좀 벌고 싶긴 한데 주기적으로 나가야 하는 출근지가 생기면 병원 다니기도 힘들어지고 스트레스도 생긴다. 좀 아쉽긴 하지만 특수 기술이 필요 없는 아르바이트도 40대 여자를 쉬이 승낙할 일은 많지 않기에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로 인해 또 다른 내적 비하가 생긴 건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것도 오사카가 준 큰 변화고 희망이다. 도시가 준 매력도 있지만 교묘하게 맞아떨어진 절묘한 타이밍에 최선과 내려놓음이라는 상반되는 키워드를 가슴에 새겨 주었다. 나쁘지 않다. 여행을 통한 가장 큰 소득이다. 돈보다도 중요한 자신감, 기대, 소망,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 시험관을 계속하면서 또 다른 인생을 설계해보려고 한다.


오사카 다녀온 건 지지난주고 지난주에는 내장산에 다녀왔다. 교토, 오사카가 11월에 최대 단풍 관광객을 수용한다고 하니 조금만 늦게 갔으면 제철 단풍을 실컷 느끼고 왔을 테다. 서울보다 남쪽이라 아직 따뜻하고 특정 시간대는 더울 정도로 가을이 무르익지 않은 때에 갔기 때문에 오사카 멋스러움을 한껏 뽐내기 직전 부릉거리는 준비 단계 단풍만 보고 왔었다. 이곳이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면 정말 멋있겠다고 생각한 아쉬운 장소들을 뒤로하고 한국에 와서는 또 다른 여행 상품 예약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못 본 단풍을 내장산에 가서 보자. 대한민국 내장산도 외국인에게 인기 있는 단풍 관광지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걸. 끊임없이 움직이고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부정적인 생각을 마비시켜야 버틸 수 있다.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걸 인정해야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


내장산에서 아쉬움을 달래며 본 단풍으로 나무는 어디나 비슷비슷할 테니 크랍바디로 딴 부분컷처럼 이게 오사카에서 본 단풍이다 생각해 보자. 유치하지만 홀로 마음을 다스리기에 적절한 활동이었다. 오사카의 수려한 도시 모습에 내장산 절경을 오버랩시켜 단풍으로 물든 오사카를 상상하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낡고 사진을 누추하게 만드는 멋없는 보조가방은 버려야겠다. 세련되고 사진도 잘 나오게 하는 걸로 새장만 해서 다음 여행에 들고 가야지. 소소하게 여행 후일담을 뒤돌아보며 추억 페이지를 한 장 넘긴다.




(다음 편은 ‘난임환자의 오사카 여행’ 최종화로 여행하는 동안 찍은 사진을 공유합니다. 실버반지는 언제나 독자님들을 위해 좋은 글을 제공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난임 환자의 오사카 여행(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