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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Dec 26. 2023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리고 돼지고기

Snow and Pork

학수고대하던 크리스마스 연휴가 지나갔고 내 기억 속에는 자비 없이 내리던 하얀 눈만 새겨있다. 23일 새벽에도 눈이 내렸고 24일 밤에도 25일 낮에도 베리류의 작은 열매만 한 크기의 순백의 눈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23일 새벽에도 쌓일 만큼 내렸고 또 그날은 아파트 단지 한 동에 한 두 집 불 켜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이른 시간부터 눈이 떠져서 제법 쏟아지는 눈송이를 관찰했다. 


눈은 이틀에서 사흘 내내 바닥에 쌓였고 밑창 두툼한 신발을 신고 있지 않으면 자칫 양말을 적실 수도 있을 만큼 높이가 꽤 있었다. 그래도 함박눈이 절정을 이룬 23일 야간은 사람이 활동하는 시간대는 아니어서 몇 년 만인지 새하얀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한 날 우산이나 모자 같은 설경을 차단할 만한 별도의 장비 없이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암흑 속에서 펑펑 쏟아져내렸던 눈들은 제 하나의 모습은 작은 열매 같았을지언정 다 내리고 나서 합쳐놓고 보니 나뭇가지들을 솜털처럼 장식했고, 놀이터를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 넣었으며, 야외 정원 조경용 돌이나 공원 정자 등을 마치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변신시켜 주었다. 둥그런 돔 형태의 투명한 유리통을 흔들면 안에 들은 액체 분자가 위치를 이동하면서 눈 내리는 효과를 연출하는 스노볼 속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아파트 단지와 단지 사이를 잇고 정원과 놀이터 가는 길을 연결해 주는 길목마다 하얗게 쌓인 눈은 동트는 무렵까지 새 한 마리 밟고 지나가지 않아 먹어도 될까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깨끗했다. (그 정도로 하앴다는 의미일 뿐 길에 쌓인 눈은 물론 먹으면 안 된다.) 밖에 나가서 저 눈 제일 먼저 밟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고층부에서 내려다본 눈 쌓인 절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쫄깃한 보쌈과 청양고추 흡사한 수준의 매운맛을 자랑한다는 불족발을 시켜놓고 남편과 나는 마주 보고 앉았다. 눈 내리기 전까지 먹은 만찬은 이른바 '반반보족'이었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영하 15도 날씨를 뚫고 1.5킬로미터를 걸어온 우리는 든든한 돼지고기로 속을 채우자는 의견에 서로 일치했다. 보쌈은 아삭하고 매콤한 무절임을 고기에 올려 상추에 싸 먹고 불족발은 그 자체로 강렬한 매운맛과 단맛 그리고 짠맛을 연출하기에 별도의 소스는 필요치 않았다. 반반보족의 총량은 한 접시를 그득 채워 나왔기 때문에, 다량의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하는 죄책감을 일으킬 수 있는 속내를 다소나마 안심시키기 위해 야채 섭취가 필수였다. 이는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것은 건강에 해가 될 수 있으니 일부는 신선한 채소와 식물성 단백질로 대체해주어야 한다는 남 가르치기 좋아하는 어느 나이 지긋한 신사(일명 '꼰대'라 한다)의 말을 들은 것 같은 울림이 기억 어딘가 저장되어 있어서다. 


보쌈 한 점, 불족발 한 점 집어 먹을 때마다 생부추와 당근, 오이 등을 곁들여 고기 한 점, 뜨끈한 국물 한 모금 먹었다. 남편은 막걸리 한 병을 시켜 흔들지 않은 채로 따르는 맑은 막걸리 물을 컵에 담아 들이켰다. 막걸리는 세워놓은 채로 냉장고에 넣어 위아래를 뒤집어 흔들지 않은 상태여야 쌀과 발효주가 분리되어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나. 암튼 그러한 설명을 듣긴 했는데 술은 일절 입에 대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시험관 아기 시술에 도전하고 있는 나이기에 크게 호기심을 갖지 않았다. 남편 또한 어느 순간 출산 할 때까지 술을 끊겠다고 천명한 나의 선언을 지지하고 있어 막걸리 음용에 동참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다지 괘념치 않았다.


푹 고아서 적당히 질깃하게 만든 보쌈은 그냥 씹어도 입 속 가득 퍼지는 부드럽고 생생한 쫄깃함을 선사했고, 야채를 올려 쌈을 싸면 달고 짠 양념들에 휩싸여 그 맛을 배가시켰다. 부추와 무절임, 된장과 새우젓 등과 어우러진 보쌈의 풍미는 겨울철 식량을 대비하기 위해 바다에서 고래를 잡아 그 자리에서 한 점 잘라내어 바로 구워 먹는 신선하고 충만한 만족감과 흡사할 것만 같다.


불족발은 말할 것도 없다. 가게마다 나름의 비법 소스를 가지고 있으니 그 양념이 추구하는 우세 미각이 매운맛인지 불맛인지 짠맛인지에 따라 선호도를 좌우한다. 23일 밤 눈오기 전 먹은 불족은 매운맛을 추구했고 한 조각 먹고 나면 국물을 삼키거나 당근을 씹는 건 필수였다. 맹렬한 강추위 속에 걸어 나온 용기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매장주문보다 포장 주문이 많았고 그렇게 우리는 가게 전체를 통대관한 듯 단 둘만 앉아 먹고 먹었다. 크리스마스이브보다 더더욱 기억에 남는 이브의 이브 저녁식사였다.


본격적으로 쌓인 눈을 밟은 성탄 이브날에는 양말을 두 겹이나 신고 밑창이 두툼한 신발을 또 껴신어 발 시리지 않게 만들어놓고 걸어 나갔다. 따끈한 국밥과 반숙 계란프라이 척척 올린 비빔밥으로 점심과 저녁을 먹고 전날 고기로 채워진 속을 달랬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크리스마스 당일에 또 고기를 먹었다. 원래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공휴일에 생각보다 많이 문을 연 가게들을 보니 뭔가 근사한 걸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지배했다. 이브날 새벽에도 눈이 펑펑 내렸고 성탄 당일에는 낮까지 내렸다. 점심을 먹으러 나설 때에는 얼굴이나 손 등 외부에 노출된 피부에 닿으면 차갑다 생각될 정도로 눈발이 날렸다.


역시 그런 악조건의 날씨를 뚫고 또 걸어 나와 삼겹살을 거하게 시켰다. 삼겹살이라는 음식에 대한 건 반반보족을 설명한 것만큼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을 예정이다. 다만 삼겹살과 곁들여 나온 콩나물, 고사리, 생미나리, 신김치는 기본으로 나온 양을 다 먹고 처음 나온 만큼을 또 한 번 더 가져다 먹었다. 그 중에서 생미나리는 삼겹살 굽는 솥뚜껑 불판에 아주 살짝만 데쳐야 미나리 본연의 향을 느끼며 아삭 씹히는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고기 굽듯이 미나리를 기름에 바싹 구우면 결합조직은 질겨지고 씹는 맛은 물렁해져 무엇을 씹고 있는지 인지할 수 없게 흐물어진다. 아무래도 삼겹살은 많이 먹을 시 보쌈보다 조금 더 죄책감이 들 수 있다는 알다가도 모를 심리를 달래주기 위해 더 많은 양의 야채를 먹었으리라. 그리고 식당에서 친절히 제공한 셀프바라는 마음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시스템이 있었기에 원하는 양만큼 먹을 수 있었다.


우리의 크리스마스 연휴는 돼지고기로 시작해서 돼지고기로 마감했다. 아! 여기서 일러둘 것이 있는데, 사실 남편과 나는 소고기를 무척 많이 자주 먹는다. 소 모둠으로 시킬 때도 있고 살치살이나 갈빗살, 채끝살, 등심 등 단품을 키로 수로 달아 한껏 먹기도 한다. 다만 올 하반기 일부 소들이 어디 외국에서 건너온 처음 들어보는 병에 걸려 같이 사는 놈들끼리 다함께 항생제를 맞았다는 말을 듣고 소고기 섭취는 자제했다. 하지만 언제든 다시 먹을 것이니 기회가 되면 소고기 요리를 접한 오감 감각도 제공해 보겠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기억에 아로새겨진 두 가지를 대라면,

당연히 눈(Snow)과 돼지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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