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손목을 둘둘 감은 아대를 풀자 툭 떨어지는 핫팩이 감겨 있던 자리에 물집 세 개가 톡톡 잡혔다. 피부의 미세한 잔주름을 머금고 노르스름하게 툭툭 솟던 물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 급기야는 인근에 있던 놈들끼리 합쳐지기 일보직전이다.
잠자는 동안 배달을 해준다는 우주발사체 이름을 딴 그 배송 사이트에서 핫팩 30개를 구매했다. 매우 저렴하고 밖에 나가 사 와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의미에서 인건비도 절약하고 교통비도 아낀 일석이조 쇼핑이었다. 더불어 손목 아대도 구입했는데 애 낳은 여자들이 찬바람만 불면 여기저기 쑤시다며 징징대는 걸 보고 왜 저러나 싶었는데 뭐라 할 것도 없이 내가 딱 그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아이가 없다면서 무슨 애 낳은 여자 타령이냐고요? 아이는 없는데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기에 산후풍이라는 걸 겪어서다. 손목 발목이 시린 게 대표적인 유산 후유증이고 오른손잡이인 습관상 다행스럽게도 근력이 좀 더 강한 오른쪽은 멀쩡히 넘어갔고, 왼쪽 그중에서도 약하디 약한 왼손목에 치명타가 왔다. 필라테스 같은 거 할 때 한 손으로 버티는 동작에서 왼손이 오른손에 비해 힘을 못쓰고, 바람이 불면 시리다 못해 칼로 잘라져 나가는 듯한 날카로운 아픔이 그 증상이다.
어쨌든 작년 겨울에 겪은 유산 후유증으로 이런 증상을 1년 내내 겪다 날씨가 더워진 여름에 잠깐 잊었으며, 겨울이 되자 순풍에 돛을 올리듯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넣으면 겨울철 보행이 위험하고 장갑으로는 슥슥거리는 냉한 통증을 견디기에 택도 없어 핫팩과 아대를 준비한 것이다.
우주발사체 배송 서비스는 정말 잠자는 동안 배달해 주었고, 오호라 됐다 하는 마음으로 냉큼 하나를 뜯어 아대에 감아 손목을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튿날, 그러니까 어제 아침에 일어났더니 밤새 핫팩의 더운 열기와 싸우며 생성된 물집 세 개는 보란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주위의 빨간 반점들은 규칙성 없이 손목과 손날 여기저기를 수놓듯이 마구잡이로 나열돼 있었다. 끔찍하게 보기 싫은 혐오 장면이었지만 무언가 이끌리듯 무의식적으로 무감각하게 사진 한 장을 남겨두었다.
사진을 본 지인들은 어서 빨리 병원을 가보던지 약국을 가던지 하라며 호들갑을 떨어주었고, 황급히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결과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수 있다는 무서운 글을 발견한 게 그로부터 하루 지난 오늘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화상전문병원에 예약하고 곧장 뛰어간 건 비단 지인들의 호들갑 때문만은 아니었다. 검색한 글 속에는 저온화상을 입고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신경까지 손상되었기 때문이며, 겉으로 티는 안 나는 게 안으로 파고들어 근육까지 염증이 퍼질 수 있으며 피부재건 치료까지 갈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정보가 작은 휴대폰 안에 실려 손안에 들려져 있으니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도 굶고 오후 진료 1번으로 달려간 병원은 보건복지부에서 지정한 화상전문센터였고, 성형외과에서 그 진료를 담당하고 있다. 아버님 연배쯤 되어 보이고 이마 쪽 앞머리가 다소간에 벗겨진 금테 안경을 쓴 나이 지긋한 남자 의사는 화상을 일으킨 출처가 어디인지 물었다. 핫팩이라는 두 글자를 들음과 동시에 뭘 물어보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얇은 가위로 물집을 터뜨려버렸다.
그 가위를 의사 오른손으로 집어들 때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내심 물집은 터뜨리고 싶지 않았다. 자연히 없어질 거 같기도 했고 지금 현재는 아프지도 않은데 출렁거리고 몽글몽글한 물집을 터뜨려버리면 적나라하게 드러난 속살이 통증을 일으킬 거라는 겁이 앞섰다.
그리하여 가위를 물집에 갖다 대기 직전 '아악~ 이거 아픈 거예요?' 했더니, 아버님 같은 의사는 '하나도 안 아파요 허허허'라며 소리소문 없이 가위로 유방 보형물을 최소형으로 축소해 놓은 것 같은 - 실제로 물집을 만지면 유방보형물처럼 출렁거렸다.- 물집 녀석들 표면을 스윽 잘랐다.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돌렸고 이후 과정은 볼 수 없으니 알 수 없다.
다만 사라져 버린 물집이 있던 자리에 바른 연고는 무척이나 따가웠고 왼손을 붙잡혀 있으니 무의식적으로도 신체의 왼쪽은 가만히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오른쪽 다리를 들어 1초에 두 번씩 바닥을 내리치며 통증을 참아냈다. 정확히 말하면 꽥꽥 소리를 지르며 오른발로 진료실 바닥을 굴러댔으니 말없이 삭힌 건 아니다.
간호사는 어떤 연고를 쓸 것인지 의사에게 물었고 지정해 준 연고와 재생 제재를 꺼내면서 내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한 마디 했다. 이거 4만 원이에요. 비급여라는 뜻이고 밖에서 사면 안되며 이걸 써야 한다는 내용은 친절하지만 귀에 들리는 순간 전혀 친절하지 않은 정보로 들렸다. 병원비가 또 나가는구나.
연고를 면봉에 묻혀 슥슥 바르고 재생폼을 잘라 덧붙인 후 압박 붕대 같은 걸 한 겹 덧씌우며 이걸 직접 할 수 있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할 수는 있는데...라고 하며 끝을 흐린 이유는 너무 아픈 나머지 말끝을 이을 수 없어서였다. 태도는 불친절하면서 내용은 친절한 그 간호사는 연고가 아픈 거라며 고통스러워하는 내 말을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한 수 더떠 물도 닿으면 안된단다. 손목인데 물을 닿지 말라니 샤워는 한쪽 팔 올리고 한다쳐도 그럼 머리는 어떻게 감고 세수는 어떻게 한답니까.
앞서 말한 연고를 바르고 폼을 붙이고 압박 붕대로 고정하는 그 과정을 기쁨과 환희에 차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는 중인 크리스마스 때까지 직접 하라고 한다. 그리고 성탄일 다음 날 병원에 오라는 지시를 내린 게 약 두 시간 전이다.
내용은 친절하고 어조는 불친절하게 설명해 줬던 치료 재료들을 가방에 쑥쑥 쑤셔 넣고 미납 금액을 결제하니 이래저래 10만 원은 나왔다. 순식간에 소고기 2인분이 날아가버렸다. 남편 연말 선물도 못 사주고 시험관 치료비로 쪼들리며 생활하던 중에 예상치 못한 거금이었다.
연고를 막 바를 때보다 따가움은 많이 덜해졌는데 두 시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욱신 거린다. 4만 원짜리 연고에 재생테이프에 치료비 금액이 찍힌 영수증을 들고 나오며 화상치료의 힘듦을 절감하며 병원을 나섰다. 아프기도 아프지만 돈이 만만찮게 드는구나. 앞으로 몇 번을 더 병원에 가게 되려나. 금방 나으면 좋겠는데.
소고기 사 먹을 돈은 잃어버린 셈쳤으니 집 가는 길에 돼지고기나 사가야겠다.
손톱만 한 크기지만 피부를 상실했으니 고기로 보충해 줘야지.
급작스러운 고통에 잠시 나마 진료실을 떠들썩하게 소리를 질러댔던 째지는 외침이 다소 부끄러워지는 걸 느끼는 거 보니 정신이 좀 돌아왔나 보다.
아프고 우울해 꿀꿀해진 기분은 돼지고기로 달래고,
거하게 한 상 저녁으로 차려먹은 후에 잠이나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