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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May 05. 2024

관절염

나이가 듦에 따라 신체가 골고루 노화되어 가는 것도 복이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신경, 정신, 골격 등 모든 세포가 제 나이에 맞게 가야 옳다.


90대 할머니라면 뼈와 관절이 약해짐과 동시에 두뇌와 언어도 세월의 영향을 받아 행동이 느린 만큼 말도 느리다.

통탄해 마지않을 일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인지, 좌우 간에 주둥이는 나불나불거리는데 관절은 80대 노인이 되어 버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말문이 트이는 건 첫 돌 무렵 아기라면 해내는 것이고, 그때부터 시간의 흐름과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말은 많아지고 움직임은 덜 하려고 하는 나이 대가 중년쯤인가? 중년 나이에 연골이 완전 소실이 되고 관절뼈 마디가 서로 닿아 골 손상까지 왔다는 충격적인 진단이 내려졌다. 발병 부위는 손가락이다.


‘나’란 사람 글로 먹고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살아가는 중인 데다, 생식기관이라는 특수부위에는 억 겹의 세월에 빗댈 만큼 흘렀음에도 아이를 낳아 늦게나마 육아를 하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한데 일평생 쓰라고 만들어 태어난 연골을 반생도 못살고 다 써버렸다니. 그간 들었던 어떤 진단에 비해도 우울하기 짝이 없는 선고다.


아이 낳기가 힘든 나이라 임신을 위해 애쓰고 있을 뿐 신체 다른 부위는 문제없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몇 년 전부터 서서히 아팠지만, 공적으로 사적으로 워낙 써 남기는 글의 양이 많고 전날 타이핑을 많이 했다 싶으면 다음 날 손가락 통증이 오는 정도인 줄 알았다.


진단 내린 의사 말로는 매우 보기 드문 심각한 상태며, 희귀하게 안 좋은 케이스라고 한다. 상병명에 ‘미란성’이라는 용어가 들어가는데 이 말의 뜻이 ‘깎였다’, ‘파였다’라는 의미로 골, 그러니까 뼈 손상이 온 관절염이라는 뜻이다. 동일 연령 대 천 명 중에 (나쁜 순위로) 1, 2등인 안 좋은 상태라고 한다. 유전 요인이 크다고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심각한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고 계신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임종 직전까지 끔찍한 관절염에 시달리다 가셨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실 무렵 거의 거동을 하실 수 없으셨다. 두 분 다 류마티스다. 그래서 나도 괴이하게 변한 손가락을 무심코 바라보다 류마티스 내과를 갔는데, 예상을 엎고 퇴행성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주치의 소견으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무엇이 다행인가 싶다. 40대 중반에 80대 손가락을 갖게 되어버린 두뇌가 아직까지 팽팽 돌아가고 기억력에도 전혀 손상이 없는 목소리 낭랑한 여인이 말은 잘하는데 관절이 삐그덕 거린다니 이런 언밸런스가 또 있을까.


관절염 판정을 내린 의사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내게 말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손이 뻣뻣할 때는 따뜻한 물에 담그고, 무게가 나가는 덤벨이나 원반을 드는 운동은 피할 것이며, 빨래는 기계로만 짜야하고, 타이핑은 살살 치라고 한다. 타이핑은 살살 치라고 한다.. 타이핑은 살살 치라고 한다…


하늘이시어 타이핑을 살살 치라니 이 무슨 사형선고입니까. 아이 키우면 손을 쓸 일이 많을텐데 육아는 어찌하란 말입니까. 후자는 뭐 추후에 차차 생각해 보더라도 글을 쓰고 싶다는 애틋한 삶의 소망과 잃을 수 없는 꿈이 만들어가는 자존심에 적잖이 상처를 입히신 것 아닙니까.


타고난 연골, 관절이 약해 40대 중반에 80대 할머니 손가락이 되어버렸다. 영화에서는 볼 법한 반인반수처럼  어딘가 묘하게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마치 음역대가 맞지 않는 공연을 펼치고 있는 아마추어 중창단 같다. 내 몸 신체 각각 부위가 나이를 망각하고 나불거리는 주둥이는 20대요, 먹는 거라면 없어 못 먹을 지경인 소화기관은 10대스러운 데다, 생식기관은 40대에, 생각은 그럭저럭 뒤처지진 않는데 관절은 80대란다. 얘들아 왜 따로 가는 거니 나이가 들면 조화롭게 나이가 들어야지.


관절염이 시작되고 3년 이내에 변형이 온다는데 나는 이미 변형이 와버렸다. 변형이 오기 전에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춰야 하는데 손을 쓸 새도 없이 마디가 툭 툭 튀어나와 뼈로 이루어진 매끈한 부위와 굵기 차이가 생겨 대나무처럼 굴곡지게 되었다. 기괴한 모양이 더욱 두꺼워지고 도드라질까 심히 걱정된다.


류마티스내과에서 전원 해서 정형외과를 찾아가 보려고 한다. 물리치료로 통증이라도 경감시킬까 하는 바람으로 괜찮은 치료기기가 있으면 구입도 할 예정이다. 글 쓰는 작가로서 손을 보호해야 했는데 이를 간과한 나 자신이 밉기도 하고, 약한 연골을 물려주신 조상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앞으로를 생각할 때다. 당분간은 ‘살살 쳐야 하는’ 타이핑에 길들여질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나면 ‘생로병사의 비밀’이나 ‘인간극장’이나 ‘이것이 인생이다’ 같은 흔치 않은 사연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불러주려나. 방송 관계자님 계시면 저 좀 관심 가져 주세요~ 반생도 못살고 연골이 아작 난 여인이 여기 있습니다~ 흠.. 뭘 좀 먹으면 도움이 되려나.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질환에 대한 공부도 해봐야겠다. 40대 나이에 관절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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