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까지 재직 상태였으니까 퇴사 후 1년가량 지났다. 이것이 보통 퇴사로 여겨지지 않는 게, 단순히 회사를 사퇴한 것이 아니라 직을 내려놓은 것이란 쓸쓸한 감정이 들어서다. 직을 내려놓았다는 건 물러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잃는다는 뜻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껏 내가 사회에서 해왔던 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도 무난히 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회사에 큰 매출을 가져다주고 고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명감만 있다면 너끈히 해낼 수 있는 그런 일들 말이다. 대학 생활을 하며 진로와 취업 방향을 정할 때 그런 선택을 했다. 특수한 자격을 요하는 직무가 아닌 민간 회사들이 제시하는 입사를 위한 관문에 합격하여 착실히 경력만 쌓는다면 익숙해지는 대로 임금을 올려주는 일. 즉, 월급쟁이 생활을 택했다. 그러니 이 나이에, 이 경력에, 이 정도 스킬로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 어렵겠지 않은가 싶다.
퇴사 직후인 작년 3월부터 6월까지는 온갖 관리에 매달렸다. 좋은 음식, 좋다는 약, 영양제, 운동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했다. 무교의 특권이라며 밤이면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독교 식으로 기도를 하고, 절에 가면 합장을 하고 부처님께 빌었으며, 성당에 가면 성호를 그리며 성모마리아께 아기를 보내달라고 옆사람이 보면 애처러울 모습으로 땅에 꼬꾸라지듯 기원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금방 난임에서 벗어날 것처럼. 심지어 혼자서 청계산 등산도 했다. 작년 줄지어 일어난 묻지 마 사건 이후 등산과 국립공원 둘레길 탐방은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바로 그만두었다. 산에 오른다는 게 쉬운 일인가. 이 정도 겁쟁이가 그런 시도까지 했다면 아기를 위해 별 짓 다 한 것과 진배없다.
당시에는 낙담하고 화가 난 나머지 인지를 못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처음으로 보낸 PGT 배아가 통과를 못했던 때가 대략 퇴사 1년 될 무렵이었다. 작년 7월부터 올해 3월까지 두 달 간격으로 채취한 배아에서 간신히 5일 배양이 나왔고 PGT를 보냈는데 그것이 불쌍한 성적표를 받아온 것이다. 꼭 1년 만이다.
시험관에 매몰된 1년이 이렇게 가버렸다. 안 그래도 점점 불확실해지는 마당에 계속 이런 생활을 한다면 1년이 또 이렇게 가버릴 수도 있다는 뜻인가. 어느덧 스멀스멀 딴생각이 밀려왔다. 이 기회를 이용해 자격증을 따고 싶고 어학도 향상시키고 싶다. 하고 싶고 이루고 싶던 수만 가지 일들이 그간 시험관 성공이라는 큰 목표를 앞에 두고 속절없이 밀려나갔다면 지금은 다르다. 두 달 텀을 두고 한 차수씩 시험관을 하고 있는데 이번 시험관과 다음 시험관 사이에 휴지기를 갖는 한 달 여 간의 시간이 학원을 다니기에 애매하다. 일정에 딱 맞게 개강하는 수업이 있어야 하고 그 코스가 쉬는 기간 안에 끝나야 하는데 내 의지가 아니다. 학원에서 개설을 해줘야 한다. 슬슬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시험관이 방해가 된다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사실 아침부터 밤까지 잠자는 시간조차 철저하게 날 위해서 살아보는 일이 요즘 시대에 쉽지 않다. 깨어 있으면 일을 위해 매진하고 잠자는 것조차 다음 날 일하기 위해 쉬어두는 것이며, 매일 단장하고 용모를 가꾸는 것도 일할 때 좀 더 돋보일 수 있는 스타일로 치장한다. 가령 긴 생머리보다는 살짝 쳐올린 단발이나 쇄골라인 헤어스타일 혹은 자연스러운 웨이브로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어필하는 듯한 세련된 모양으로 말이다. 주말에 이틀간 회사에 안 나가는 것은 일과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다음 주 한 주간 회사에 나가기 위해서 잠시 쉼을 택한다. 이것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일꾼들의 모습이다.
지금 이런 삶이 한창 피크를 올려야 하는 중년 나이에 스트레스도 받으면 안 되고 무리해서도 안되고 잘 먹어야 하고 잘 자야 되는 삶을 살고 있는데 멋지지 않은가? 내 인생에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는 날이 또 있을까. 훨훨 날아오르고 싶은 꿍꿍이가 똬리를 튼다. 이 기회에 나중에라도 쓸만한 자격증 하나 따놓고 유창할 정도까진 안되더라도 외국인과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만한 영어 실력은 만들어 놓고 싶다. 하. 그런데 시험관을 해야 되네. 마치 20대 때 임신 출산이 커리어 쌓는데 방해가 되니 일단 연애와 결혼은 미뤄놓고 살았던 때처럼 다른 일에 매진하고 싶어 진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이라서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건 잘 잊는다. 마음이 콩밭으로 가다가 시험관 하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