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김이박, 연애를 말하다
네 번째 이야기: 판도라의 상자
박 양 다들 잘 지냈어? 이제 곧 추석 연휴라 회사에서 다들 바쁘겠다.
이 양 일이 있는데 안 할래. 연휴 끝나고 하련다…….
박 양 일이고 뭐고 건들고 싶지도 않을 때가 있지ㅋㅋㅋ
김 양 나도 연휴 다 끝나고 할래. 오늘 주제는 뭡니까?
박 양 오늘은 우리 저번에 말했던 대로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 말이 되게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아. 김 양이 소개해 줘!
김 양 보통 연인의 사생활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표현하곤 하지.
그 중 대표적인 게 휴대폰과 SNS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많더라. 페이스북 메시지나 뭐 그런 것들.
박 양 다들 휴대폰 비밀번호나 메신저, SNS 비밀번호 서로 알고 있어?
이 양 응. 우리는 서로 핸드폰에 지문인식을 해놨어. 지문 하나면 다 볼 수 있지. 하하하!
박 양 비밀번호는 절대 공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종 풀어 달라고 해서 구경하기도 하죠.
김 양 우리도 서로 직접 나서서 보여주지 않는 이상 보려고 하지 않아.
그런데 가끔은 카톡하는데 남친이 몰래 보려고 흘끔거리긴 하더라고!
이 양 가끔 자리를 비울 때 살짝 보기도 해. 오빠도 전에 내 핸드폰 본 적 있다고 자백하더라.
심한 욕들로 가득한 내 단체카톡방을 본 것 같아서 찝찝하지만,
그 외에는 찔리는 게 없어서 그냥 남친이 귀엽기만 했어.
박 양 나는 그냥 사진 보는 척하고 이것 저것 다 봐.
이 양 비밀번호 공유랑 직접 보여달라고 하는 건 무슨 차이야?
박 양 큰 차이는 없는데 기습적으로 보지는 않는 거지.
김 양 비밀번호 공유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거고, 보여달라는 건 상대의 허락을 받고 보는 거니까.
이 양 아,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면 수시로 볼 수 있으니까?
박 양 응. 그리고 남친의 비밀번호를 알려면 명분이 필요해요. 핸드폰 사진 볼래! 뭐, 이런 명분.
김 양 얼마 전에 소름 돋는 얘길 들었어.
한동안 인터넷에 그런 사이트가 되게 유명했잖아.
자기 여자친구나 아내 몰래카메라로 찍어서 공유하는 사이트 말이야.
근데 어떤 여자가 혹시나 하고 그 사이트에 남친이 자주 쓰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더니
로그인이 됐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박 양 세상에, 처음 들어. 아 진짜 소름.
김 양 그 순간, 그 여자 앞에도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것이죠…….
이 양 끔찍해. 그런 거 보면 마냥 안 보는 건 또 아닌 것 같아.
박 양 그러니까.
이 양 나는 가끔씩 판도라 열지 않고도 행복한 게 진짜 행복한걸까? 란 생각을 해.
그냥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김 양 맞아……. 약간 '눈 가리고 아웅'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양 그런 말이 있잖아. 모르면 행복하다고. 그런 느낌이야, 일부러 안 보는 건.
박 양 나도 일단 서로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김 양 내 경우에는 오빠 휴대폰을 못 보는 이유가 내 휴대폰을 보여줄 수 없어서이기도 해.
내 휴대폰 자체가 판도라이기에…….
이 양 ㅋㅋㅋ아니 사진첩말구 카톡도 못보여줘?
김 양 사진첩 뿐만 아니라 카톡도 못 보여줘. 왜냐하면 나는 아이돌 덕후잖아.
단체카톡방 이름에도 덕후 냄새가 폴폴 나서. ^^
이 양 덕밍아웃만큼 무서운 게 바로 욕밍아웃이지.
내가 욕 해놓은 카톡방 보고 오빠가 충격먹었던 게 생각나네.
미안해, 오빠……. 욕쟁이 여친이라서 미안해.
김 양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끝까지 남친의 환상을 지켜주고 싶어.
이 양 내가 오빠랑 사귀면서 딱 한번 욕을 할 뻔 한적이 있어.
같이 손잡고 걸어가는데 길고양이가 갑자기 확 튀어나왔을 때, 씨ㅃ…까지 했어!
만약 그때 끝까지 해버렸다면……. 절레절레.
김 양 조심해야 해!
박 양 근데 이런 말도 있잖아. 비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비밀이어서 그런 거라고.
이 양 워……. 뒤통수 깡 맞은 기분. 맞아, 근데 나조차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밀이 있어.
박 양 그런 거 보면 난 엄청 가식적인가 봐. 스스로 비밀이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
김 양 맞아. 그래서 나도 스스로 상대한테 뭔가를 캐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ㅋㅋㅋ
나의 전부를 다 보여줄 자신도 없는데 상대의 모든 것을 보려는 건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해.
이 양 나는 사소한 걸 비밀로 할 때가 많아.
매일 집에서 열심히 팩 하는데 팩 한다고 말 안 하고, 저녁 굶은 것도 잘 말 안 해.
내 여친은 관리 따로 안 해도 원래 예쁘구나, 이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김 양 근데 그 정도는 너무 귀엽다. 귀여운 비밀!
박 양 나도 남자친구 앞에서는 자동 공주병 모드로 변해ㅋㅋㅋ
김 양 난 겉보기와 다르게 소심하고 감수성 많은 작은 아기고라니 같은 사람이야! (예민 예민)
이 양 그런데 남친의 핸드폰을 보면 진짜 사소한 부분에도 실망하는 건 사실이야.
예를 들어, 남친이 카톡으로 여자동기한테 이모티콘을 날렸다? 그날로 죽음이라 이거예요!
김 양 아, 경험담이신가봐요? ^^
박 양 그럴 것 같아 왠지ㅋㅋㅋ
이 양 맞아요. 내일 데이트하는데 만나서 남친 어디를 때릴까? 다들 골라줘.
1. 대가리 2. 대가리 3. 대가리
뭘 깰까요?
김 양 저는……. 2번?
이 양 후……. 잔인한 여자. 2번이 제일 아픈 대가리였어. 당첨……. ㅎㅎ
그러면 다들 남자친구의 사생활 어디까지 용납할까?
음, 용납까지는 아니고 뭐라 할까. 너그러이 봐줄 수 있다? 그 기준은 뭐야?
김 양 그냥 나한테 피해를 안 끼치는 거? (차갑)
박 양 저는 밤새서 놀아도 상관없고 뭐 그런데, 사실 내가 알았으면 좋겠어. 뭐하고 있는지. 나는 보고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 아하. 그냥 보고하면 다 돼?
김 양은 나에게 끼치는 피해라면 어떤?
김 양 나의 감정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행동이지, 뭐.
분노가 생긴다거나…….
이 양 앞 뒤가 안 맞잖아ㅋㅋㅋ 아기고라니같은 사람의 감정 변화를 어떻게 다 맞춰줘!
김 양 맞추라 그래! (역정) (노발대발)
※ 여기서 잠깐!
김 양의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이유는 방금 남친과 생애 첫 싸움의 조짐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양 분노 폭발ㅋㅋㅋ
그리고 박 양 말처럼 보고 진짜 중요해. 그럼 이런 상황은 어때? 들어봐.
남친이 회식 중인데, 옆에서 여직원이 엄청 나대는거야.
"김 대리님, 전화 끊으시고 얼른 오시라니까요? 뭐야~ 술자리 그렇게 오래 비우는 거 아니예요~"
그걸 듣고 있던 내가 용기 내서 어디 한 번 바꿔보라해서 바꿨더니, 훈계를 하네?
사회생활해보면 알겠지만 술자리는 오래 비우는 거 아니라고.
딱 30초 줄테니 전화 끊고 얼른 들여보내라고. 어때?
박 양 이 못된 기집애. 죽으실래요? (매우 순화함)
※ 여기서 다시 한 번 잠깐!
이 양이 제시한 상황이 김 양이 현재 겪은 상황과 놀랍도록 비슷하여 더욱 더 분노하고 있습니다. (분노주의)
김 양 그러면 저는 그 여자의 뭐를 깨야 할까요? 1.대가리 2. 대가리 3. 대가리
박 양 역시 대가리는 3번이죠.
이 양 후……. 난 좀 더 비열하게 1번?
김 양 나는 솔직히 4번 대가리도 괜찮을 것 같아^^
이 양 4번은 너무 잔인한데?
김 양 사실대로 말할게.
나는 내가 정말 연애에 쿨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나네ㅎㅎ
이 양 당연히 쿨할 수 없어.
어쩌면 이번 일이 김 양의 연애 인생에 첫 싸움이 될 조짐이 보이네.
박 양 맞아. 연애에는 절대 쿨해질 수 없어.
김 양 응. 두 주먹 불끈 쥐고 연애가 쿨할 수 없다는 걸 몸소 배우고 있어요^^
샌애기의 깨달음이랄까?
이 양 연애에 쿨한 사람은 정말 드물 거야.
김 양 하, 진짜 얘기하다보니까 판도라는 다른 특정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내가 이 사람과 사귀면서 이런 일 때문에 싸울 줄 몰랐던 의외의 사건으로 싸우게 되는 거 자체가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고 하는 거 같아.
나는 판도라 상자하면 휴대폰, SNS 딱 이렇게만 생각했었거든.
이 양 당연하지. 그 남자의 다른 면을 보게 되는 것도 판도라의 상자를 연 거랑 같다고 생각해.
내가 미처 몰랐던 그 사람의 내면.
박 양 맞아. 몰랐던 그의 모습. 무심함 같은 것?
김 양 맞아. 그것 또한 판도라의 상자였어.
이 양 꼭 판도라 상자가 핸드폰이나 SNS라는 법은 없는 것 같아.
그사람 자체가 상자인 셈이지.
박 양 맞아. 사람의 내면일수도 있지.
김 양 듣고 보니 그렇네.
이 양 그 사람의 밑바닥에 있는 것까지 본 뒤에
그 사람의 그런 모습들까지도 받아줄 수 있으면 오래 가는거고 아니면 그냥 놔줘야 해.
그건 감싸 안는다고 되는 게 아닌 거 같아. 외면하는 건 결코 답이 될 수가 없어.
김 양 동감해. 감당할 수없다면 놓는 게 맞아.
박 양 물론 사귀다 보면 뭔가 실망하기 마련인데, 그걸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중요하겠지.
이 양 휴, 아무튼 연애를 하면 계속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단점도 계속 발견할텐데.
그 과정 자체가 무섭고 또 다시 겪기 싫은 건 누구나 당연한 일이겠지?
오래 사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걸 두려워하는 것도 그 이유 아닐까?
김 양 그런 것 같아. 그 상자가 이 남자한테도 분명 또 있을 텐데 그걸 열기가 두려워지는 거지.
이 양 또 다시 그 상자를 열고 꺼내는 과정을 반복해야하니까…….
역으로 그사람한테도 내 안을 보여줘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괴로운 일이지.
박 양 결국 테스트는 끝이 없어.
김 양 사람의 감정이 단일화가 된 것이 아니니까 상자도 많을 거야.
더군다나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길면 길수록 더 그렇겠지?
박 양 사람은 너무 복잡한 존재야.
김 양 판도라의 상자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사실 되게 가볍게 생각했었어.
휴대폰을 서로 보는가 마는가 딱 그 정도 얘기가 나오겠거니 했거든.
근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보다 더 깊게 들어갈 수 있게 됐어.
사람이 판도라의 상자 자체고, 그 사람의 감정이고. 이런 것까지 알게 되네.
이 양 바람이나 인성 문제 같은 정말 노답인 판도라는 차라리 쉬워. 헤어지면 되니까.
근데 그냥 성격적인 단점이 판도라의 상자에서 쑥 튀어나오면 정말 어려워.
내가 조금만 이해하면 관계가 유지될 것 같은 수준의 판도라들 있잖아.
예를 들면, 약속 늦는 것. 잠이 많은 것. 준비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등등.
박 양 애매한 것이 제일 무서워.
김 양 맞아. 애매한 단점은 서로 맞춰갈 수 있으니까 더 고민되는 것 같아.
이걸 맞춰, 말아?
박 양 그거 알아? 판도라의 상자 맨 마지막에 뭐가 있었는지?
김 양 끄흐(눈물)
이 양 희망!
박 양 맞아ㅋㅋㅋ
김 양 (감성주의) 나 약간 눈물터질 거 같은데, 지금.
박 양 워워, 토닥토닥!
이 양 사실 그 희망 때문에 많은 애들이 피보는 것 같아.
얘의 이 부분을 내가 고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혹은 이 부분은 내가 안고 갈 수 있겠다는 희망.
김 양 그게 바로 평강공주 컴플렉스지. 이 온달을 내가 만들겠다!
이 양 제일 내가 이해못하는 케이스ㅋㅋㅋ
사람 고쳐쓰는건 아니라고 했어요. 걔네 엄마도 못 고친걸 내가 머라고 고칩니까요~
그래서 나는 치명적인 단점만 아니면 그냥 안고 가.
쟤가 단점을 고치지 못하고 평생 저렇게 살아도 괜찮다 싶을 정도의 단점만 안고 가요.
그 이상은 나까지 썩어갈 것 같아서 포기!
박 양 나는 친구들까지 고치려고 하는데, 남친은 오죽하겠어?
그러고 보니 난 꽤 오랫동안 폭력을 행사하고 살았던 것 같아.
이 양 근데 중요한 건 친구든 남친이든 상대한테 선생질 하면 나중에 욕 먹는것도 나야ㅋㅋㅋ
박 양 맞아.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거든요.
김 양 그럴 때는 좀 서러워.
아무튼 판도라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흡 (감성주의) 왔네ㅇ……. 흡!
이 양 결론을 내보자면, 판도라에서 나온 부정적인 것들을 잘 맞춰가는 게 연애가 아닐까?
서로의 부족한 점을 그래도 같이 안고 가는 거!
그리고 남친이든 나든 누구나 판도라의 상자다, 라는 거.
김 양 나도 판도라의 상자다!
박 양 나도 판도라의 상자다!
이 양 갑자기 그 대사가 생각나. 영화 <포레스트 검프> 대산데,
"인생은 하나의 초콜렛 상자와 같아서 꺼내면 무슨 맛이 나올지 알 수가 없다."
박 양 캬…….
김 양 크흐, 맞아. 뭐든 미리 알면 재미없잖소.
이 양 인생 뿐만아니라, 연인도 하나의 초콜렛 상자라고 생각해.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있는 초콜렛이 달콤한 초콜렛인지,
독한 술이 든 쓰기만 한 초콜렛인지는 아무도 몰라.
상자를 열고 초콜렛을 하나 집어 먹었을 때
내가 도저히 감당 못할 만큼 쓴 초콜렛이다, 싶으면 망설임없이 뱉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미련하게 삼키지 말고. 오늘의 갈무리 역시 김 양이 해주겠습니까?
분노의 갈무리가 될지도 몰라ㅋㅋㅋ
김 양 :: 오늘의 갈무리
판도라의 상자란 인간에게 '호기심'이라는 아주 위험한 감정이 부여되면서 열린 상자잖아요.
신들이 인간을 위해 마련한 징벌의 상자이기도 하고!
연애에서도 마찬가지 같아요.
호기심을 자칫 잘못 사용하면 상자에서 나온 온갖 나쁜 감정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지럽힐 수도 있죠.
신뢰가 가장 중요한 연애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에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것 같아요.
지금 당신의 앞에 놓인 판도라의 상자, 당신은 열어보시겠습니까? (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