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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ul 20. 2016

내 이야기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벌써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틈틈이 쓰고 있는 에세이인 듯한 소설을 쓰고 있다.

그것은 2년 전 나의 제주도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나의, 나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써온 글 중에서도 나는 다음 부분에 가장 마음이 간다.


시간은 그 속에서 내가 무얼 잡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나를 반짝이게 할 수도 있고, 때론 구리게 만들 수도 있죠. 저도 공감해요. 하지만 저는 8살 때부터 그런 운명을 잡아서 저의 10대는 꽤 반짝거릴 수도 없었어요. 조금 반짝이려다가도 눈치를 보고 빛을 감추곤 했죠. 엄마는 처음에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부당하다 생각하셨을거에요. 남겨진 아이들이 많았지만 아마 도망가고 싶기도 하셨을거에요. 하지만 엄만 그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셨어요. 뭐든 닥치는 대로 하셨던거 같아요. 어쨌든 아이들 교육을 해야 했고 그 아이들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키우고 싶으셨을테니까요. 그러는 동안 저는 학교에서 믿었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배신을 당했고, 그런 생활을 감추다 저는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을 깊고 어두운 수렁 속으로 자꾸만 빠지게 만들고 있었더라구요. 자꾸만 숨고, 사람들을 피하고. 사춘기 소녀로서 당연했겠지만 그땐 정말 사람이 무서웠어요. 동갑내기 아이들이 두려웠어요. 그렇게 10대를 보냈어요. 두려워하는 채로.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썼지만 여전히 마음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죠. 시간을, 잡고 싶지만은 않더라구요. 그냥 강물도 아니고 수돗물이 흘러가듯이 콸콸, 콸콸콸 얼른, 흘러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요.

작가는 글의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어쩌면 나는 이 글의 주인공을 '나'로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위의 부분은 주인공 여자의 대사이기도 하나 그리고 짧은 삶을 살아온 내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이 사실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글을 써 내려갈 수있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7살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없이 살아온 세월은 그의 배가 넘었다.

사춘기 시절에 나는 가장의 부제가 그 시기까지의 내 인생 통틀어 제일 충격적이고 어쩌면 부끄러운 사실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눈초리 받기 쉽상이기에 어떻게서든 조심했어야했다. 엄마는 항상 "조신하고 성실하게. 엄마 욕 안 먹게."를 입에 달고 살아오셨다. 그 말은 어린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나보다, 여지껏 그 말을 가슴속에 담아놓고 나이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걸 보면. 아니 어쩌면 이제야 내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는 걸까.

사춘기 시절부터였다. 그런 환경에 더하여 나이보다 성숙해보이는 외모때문에 어른스럽게 옷을 입고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어쩌면 그래야만했다. 그 때 나는 당연히 그리고 자연히 어른인줄만 알았고 어른이 된줄만 알았는데 성인이 되었지만 이제야 그때의 어린 내가 아직도 마음 속에서는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껍데기는 성인이나 속은 아직 어리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단 말인가. 비단 이런 상황을 가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것이다. 그리고 나만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진 않을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건 어떤 의미일까. 나이만 먹는다고 몸집만 커진다고 어른이 아닌데.. 껍데기가 커진다는 것이 어른이 아닌데...'


누구에게나 잊고싶은 기억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죽음이 되었던, 외면의 아픈 기억이었던간에 잊는다고 해서 잊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 나에게 그것들은 오래된 이야기이자 내 삶의 일부이다. 여전히 나는 알게모르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있고, 엄마를 위해 살아가고 있기도 하니까. 아무래도 그건 내 삶이니까. 그것을 탈피하는 것은 오로지 저 글을 쓰면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이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저 소설을 이렇게 끝 맺지 못하는건 아닐까.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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