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상담의 추억
10여 년 전 영어유치원에서 일을 시작하고 난 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학부모 안내나 문의사항 같은 업무는 온라인 프로그램을 통해 관리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엔 뭐든지 수기로 작성하거나 전화로 해결해야 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하루를 보냈다는 알림장을 매일 써야 했고, 작은 안전사고(예를 들면 구와 부딪히거나 의자에서 살짝 넘어지는 정도)라도 발생할 경우 부모님께 바로 전화를 드리며 보고를 해야 했다. 요즘은 사진을 찍어 알림장 어플로 안내를 드리기도 한다. 게다가 원어민 교사 수업 참관, 아이들 점심 배식까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는데, 내 정신은 그저 “지금 몇 시지? 아직 12시 안 됐네.”라는 피곤함 속에 허덕였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보다 잡무로 허덕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한 달이 지났나 싶었는데, 사실 두 달이었다. 두 달인 줄 알았는데, 어느덧 다음 학기가 와있었다.
아이들과 영어를 좋아해서 이 일을 선택했고, 하루 종일 시끌벅적한 아이들 틈에서 일하는 것이 하루하루의 즐거움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을 보면서 에너지를 얻었다. 안아주고 책 읽어주고 함께 얘기하며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다. 게다가 갓 귀국했을 때라 원어민 선생님들 속, 매일매일 영어 환경 속에서 일하는 것도 좋았다.
영어유치원은 어학원으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치부 아이들이 하원하고 나면 초등부 친구들이 등원해 영어를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타 지역의 어느 캠퍼스를 다니던 친구가 우리 지역으로 이사를 오면서 어학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미술 전공자에,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바쁘신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이는 덩치가 컸지만 약간 내성적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은 시간이 걸리는 법. 그래서인지 아이가 조용한 성격이고 낯을 가려 기존 반 친구들과도 쉽게 친해지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친구들과 가까워지지 못하니 종종 작은 충돌이 생기곤 했다. 그래서 그 어머니와 통화를 할 일이 자주 생겼다.
통화할 때마다 매번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 OO는 그런 아이가 아닌데, 여기가 아직 낯설어 그런가 봐요." 정말 이틀이 멀다 하고 통화한 듯하다. 영어 때문이 아니라 교우관계 때문에...
문제는 어느 날부터 이상한 패턴이 생겼다는 거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오전 10시 40분." 그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그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데 무슨 긴급한 용건이 있던 전화도 아니었다. 내가 혹시 개인 상담자로 보였던 걸까? 대화 주제는 어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 본인의 하루 일과, 대학교 때 어떻게 영어 공부를 했는지, 지금 사는 아파트 주민과의 소소한 마찰, 층간소음 문제까지 다양했다. 전화는 대개 20분이 넘어갔다. 지금 같으면 “아, 제가 업무가 있어서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재빠르게 돌려 말했겠지만,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풋풋한 시절이었고, 학원의 이미지도 신경 써야 해서 공손하게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통화가 한 달 넘게 지속되었었고 아이가 학원을 그만두고 나서야 통화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 조차도 이렇게 추억이 되었다. 그 친구는 이제는 어디선가 훌륭한 청년이 되어 잘 지내고 있겠지. 어머니가 하셨던 ‘수다 타임’이 그렇게 진한 여운으로 남을 줄이야.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나는 그 친구 이름. O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