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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시간

[모임] 공룡이 되고 싶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 2025.7.12

by 읽고 쓰는 마음

내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역시 '가늘고, 길게'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시작한 사회생활에서 '어쩐지 자꾸 눈에 띈다'는 말이 칭찬이 아닌 걸 알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실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그래서 2번째 직장에서는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생활했다. 눈에 띄지 않게, 가급적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회식 자리에서는 늘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조용히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를 맞추며, 테이블 아래 미리 숨겨둔 냉면 그릇에 술을 따라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희미한 존재감을 방어막처럼 두르는 사회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믿었다. 캐나다에 정착해 처음 가진 풀타임 잡에서도 조용히 분위기 맞추는 역할을 고수했다. 소수의 사람들이 오랜 시간 같이 일한 조직이라 목소리가 크고, 시시콜콜한 농담을 던지고, 서로 만담을 주고받는 역할은 이미 충분했다. 그런데 3개월의 수습 기간을 마치고 새로운 직장에 익숙해질 무렵 사람들이 우수수 나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팀 하나가 통째로 와해될 만큼. 알고 보니 이 조직은 평균 2년 단위로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회사에 몸 담은 지도 어느덧 4년이 지났다. 입사한 직후에 한 번, 입사 2년 차에 한 번, 그리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나는 3번의 물갈이를 경험한 베테랑이 되었다. 3번째 물갈이에서 7년간 근무했던 사수가 나가면서 졸지에 최장수 근로자라는 타이틀까지 물려받았다. 이쯤 되니까 '가늘고 길게' 전략에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지난 4년 치의 역사를 알고 있는 휴먼 아카이브로서 내 존재감이 너무 커져버렸다. 사람들이 의견을 묻는 일이 잦아지고, 나도 오지랖이 넓어졌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사람과 일대일 미팅을 하면서 회사 조직도와 부서별 업무, 현안을 줄줄 설명하는 내 모습에 내가 제일 놀랐다.


모든 것이 편하긴 하다. 모든 사람을 알고, 모든 업무를 알고, 어떤 일이 닥쳐도 대개는 이미 경험해 본 일이다. 오래 있은 만큼 발언권도 커지고, 휴가 일수도 늘어나고, 다들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안다. 이게 내가 꿈꾸던 '가늘고 길게'의 종착역인 것도 같다. 실적 내려고 안달복달할 필요도 없고, 승진에도 관심 없고 온건하게 흘러가는 나날들. 그러다 하루는 5년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해 봤다. 5년 뒤에도 이 회사에 이 자리에서 이렇게.. 라고 상상하는 순간 방언처럼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 와씨, 너무 싫어.


나는 당황했다. 뭐지? 이렇게 살고 싶었고, 이렇게 살고 있는데 뭐가 너무 싫다는 거야? 이 자리가 싫어? 그럼 더 올라가서 매니저라도 되고 싶어?


- 대박, 그건 더 싫어.


그제야 깨달았다. 내 안에 아직 모험의 불씨가 있다는 것을. 너무 싫어서 참을 수 없는 건 회사가 아니다. 나한테 잠재력이 있는데, 더 멀리 갈 수 있는 능력과 그러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데, 편안함에 파묻혀 그 목소리를 묵살하려는 내가 문제였다. 더 많은 잠재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 내가 될 수 있는 수많은 모습들 중 최선의 나를 만들어가는 것. 이거야말로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져야 할 책임이 아닌가. 수많은 평행우주에 살아가는 자신들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다. 언젠가 다른 차원의 자신이 나를 찾아와 "안녕? 23번째 우주의 셀프. 넌 어떻게 살고 있어?" 라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답하고 싶다. 나는 이런저런 가능성을 현실로 이뤄냈노라고.


안락함도 중요하지만,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역시 발전이다. 죽을 때까지 몸이 커진다는 공룡들처럼 나도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더 자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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