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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Dec 08. 2023

[수업] 돌아보니 모두가 은인이었다

한 해를 정리하는 글쓰기 2023.12.16

2023년, 기적이 일어났다. 별안간 내 앞에 새로운 문이 스르르 나타나더니 문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덜컹 열렸다. 딱 맞는 열쇠를 끼워 돌린 것처럼. 간절히 기다렸던 마법 같은 일이다.


올해의 기적을 설명하려면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때는 2020년 말, 나는 40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까짓 40, 숫자 아닌가, 라고 무시하기에는 타격감이 상당했다. 100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악착같이 100살을 넘겨 오래 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한국 여자 평균수명이 86.6년이라는 통계를 감안하면 반환점을 돈 것이다. 나는 인생 2부를 시작하기 전, 2021년을 인터미션 삼아 나답지 않은 짓을 저지르기로 결심했다. 뭔가 새로운 것,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 결론은 봉사활동이었다. '울타리 안에는 아무나 들이지 않는다,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은 끝까지 지킨다'는 울타리주의를 신조로 삼아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 불특정 다수를 위해 헌신하는 봉사활동은 가장 나 같지 않은 일이었다. 곧장 핸드폰을 집어들고 평소 친분이 있던 한인회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한인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싶은데 적당한 기회가 없겠느냐고. 악몽의 시작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외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옥행 급행 한 장 주세요, 편도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한인문화센터 회장'이라는 거창한 감투를 쓴 뒤였다. 물론 이렇게까지 멀리 갈 작정은 아니었다. 한인회 행사에 보도자료나 만들고 번역하는 정도면 나한테 적당한 일거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전화를 받은 지인은 한인회 이사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었고, 한인회와 긴밀한 협력 관계였던 문화센터는 일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폐관 위기에 몰려 있었다. 몇 번의 미팅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은 그때부터 이미 싫었다. 나는 뼛속까지 개인주의자고, 혼자 취재해서 혼자 글 쓰는 기자 생활을 10년 넘게 했다. 조직에 속해 있어도 기자 하나 하나는 자기 밥그릇 자기가 챙겨야 하는 개인사업자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단체의 장이 된다고? 나 혼자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모아 협력하면서 같이 하라고? 맙소사. 유치원부터 시작해 30년 넘게 단체 생활을 했는데도 안 길러진 팀워크가 이제 와서 생길 리가 없잖아. 이 자리를 맡으면 후회할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 맡으면? 모처럼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기회가 주어졌는데 여기서 꽁무니를 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때 그걸 했으면 어땠을까, 두고 두고 곱씹으며 내 의지와 용기 부족을 탓하겠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자. 2021년 1월, 나는 회장으로 취임했다.


일단은 믿고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좁아터진 인간관계를 탈탈 털어 3명을 더 모은 뒤 부회장, 재무, 총무라는 감투, 아니 긴고아를 씌웠다. 코비드 사태 이후 수업을 비롯해 모든 활동을 중단한 센터에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고, 내가 제안한 '어린이한글책도서관 건립'이 첫 번째 사업으로 채택됐다. 가끔은 희망찼지만 대체로 고된 시간이었다. 우리는 맨땅에 헤딩을 하면서 변변한 장비도 없어 손톱으로 땅을 파다시피 일했다. 한 번 회의를 하면 과제가 산더미처럼 쏟아졌다. 점점 부담감에 짓눌렸고 서로에게서 오는 연락을 두려워하게 됐다.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나를 찾나 싶어서.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웹사이트 개편을 맡아주기로 한 봉사자가 발을 빼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잦은 연락과 무리한 요구를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장문의 이메일에, 해당 봉사자를 소개해 준 한인 사회의 원로까지 야무지게 참조로 넣어서.


나는 그 대목에서 활화산처럼 터지고 말았다. 우리한테 필요한 기술이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갑으로 여기고 매사에 꾹꾹 눌러 참으며 혹시나 심기를 건드릴까 이메일이나 문자 한 통도 말을 고르고 골라 공을 들였던 시간이 고스란히 분노의 땔감으로 변했다. 몇 번인가 불쾌한 이메일이 추가로 오가고 관계가 정리됐다. 화를 참을 수 없어서 어차피 다 내 친구들인 센터 단톡방에서 남은 분노와 비난을 쏟아냈다. 그러자 지금까지 얻어터진 걸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또 한 번의 묵직한 펀치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내가 친구라고 생각해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서.


그 친구의 말은 토씨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센터가 니 사조직이냐. 회장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데 친구라고 그저 감싸주는 이런 집단에서 나는 일할 수가 없다. 어차피 우린 모두 자원봉사자고 일하기로 했다가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건데, 그게 이렇게 길길이 날뛰며 화낼 일이냐. 설령 그 사람의 언행이 부적절해서 화가 나더라도 센터 관계자들이 모인 공식적인 단톡방에서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게 맞는 일이냐.' 그 친구가 속으로 삼킨 - 혹은 내가 그랬으리라고 짐작하는 - 결론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넌 틀려먹었고 그런 네가 이끄는 센터도 가망이 없어.'


어쩌면 나는 이 정도의 진실을 꽂아주는 친구의 존재에 감사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했지만 나중에 좀 진정되면 얘기하려고 잠시 내려둔 화살을 곧바로 날려, 내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막아준 은인인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울타리주의자의 옹졸한 가슴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 친구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생판 남의 편을 드느라 나한테 비수를 꽂는다는 것을. 네가 하는 말 다 맞아. 틀린 게 없어. 근데 그걸 전하는 방식이 너무 모질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니?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가차없이 날 손가락질해야 했냐고. 우리는 밤샘 통화로 어찌저찌 갈등을 봉합했지만 결국 센터는 임원을 하나 잃었고, 나는 울타리 내부인을 하나 잃었다.


그 뒤로도 상처 받을 일은 차고 넘쳤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기부 좀 해달라고 굽신대며 아쉬운 소리를 하고 다녔지만 별 성과가 없었고, 한정된 재원을 두고 다른 단체들과 밥그릇 싸움을 벌여야 했고, 주말이면 이런 저런 행사를 찾아다니면서 도서관 홍보를 했다. 나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날품팔이처럼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센터 일에 갈아넣었다. 친구뿐 아니라 가족들마저 중고 책을 구입하고, 책장을 운반하고, 도서관 공간을 청소하고, 도서 목록을 정리하는 일에 강제 동원됐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피로도 역시 극에 달했다. 우리의 근심 걱정은 편집증 수준으로 치달아 '겨울이 오면 도서관 앞에 눈은 누가 치우냐, 눈 안 치웠다가 책 빌리러 온 사람이 미끄러져서 고소하면 어떡하냐, 2인 1조로 배치한 봉사자들이 서로 싸우면 어떡하냐'라는 식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좋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늘,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불똥을 두려워했다. 죽어라 일하고, 상처 받고, 겁 먹은 토끼처럼 바들거리는 나날은 거의 재난 상황에 가까웠다. 2021년 12월, 나는 사직서를 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잡다한 이유를 끌어다 붙였지만, 본질은 간단했다. 죽도록 싫어서 더는 못하겠습니다. 이대로 카론의 뱃사공이 될 수는 없었다. 노를 넘겨 받는 사람이 없으면 내 손으로 배에 구멍을 뚫어 강바닥에 가라앉힐 작정으로 폐관 절차까지 알아봤다. 하지만 다행히도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남은 덕분에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단박에 센터와 인연을 끊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반 자원봉사자가 되어 더 일했다. 2022년 2월,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한국과 캐나다 현지에서 조달한 장서 4천여 권이 책장 8개를 꽉꽉 채웠다. 대부분이 내가 밴을 몰고 가서 실어온 중고 책장, 몇 개는 내 기부금으로 구입한 새 책장이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고, 그저 진절머리만 났다. 어린애들이 부모 손을 잡고 와서 열심히 책을 보고 빌려가는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대단한 보람을 느끼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렇게 3개월 더 봉사하면서 도서관이 자리를 잡는 것까지 보고, 센터와 완전히 작별했다. 가장 나답지 않은 미친 짓에 이 정도의 대가를 치르게 될 줄은 몰랐다. 차라리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갈 걸. 도서관 사업은 나에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친구를 잃었고, 이 비전의 시작이 된 우리집 어린이도 그새 캐나다에 적응해 한글책에 시큰둥해졌고, 어렵게 배송비를 모금해 한국에서 조달한 새 책 2천 권은 출판사가 버리는 물건이 상당수였고, 나는 2년간 회장으로 봉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이후로 잊었던 센터가 다시 내 인생에 등장한 건 지난 9월이었다. 센터에서 봉사하는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혹시 글쓰기 수업을 맡을 생각이 있냐고. 사실 회의적이었다.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어로 글쓰기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한국어만 할 줄 알면 누구나 혼자서도 쓸 수 있는데? 게다가 돈벌이와 생활은 영어로 하니까 한국어 글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 곳이 없잖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제안을 듣고부터 몸 속에서 발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로 연애를 하거나 소설을 쓸 때면 항상 돌아갔던 발전기.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고, 안 자도 피곤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천연 각성제. 멈춘 지 한참 돼서 이제 여기까지인가, 다시 돌아갈 일이 없는 건가, 라고 생각했던 그 발전기가. 진짜? 이렇게까지? 내가 이 일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머리가 의심을 하건 말건 진실의 발전기는 수업 아이디어를 펑펑 쏟아냈다. 에라 모르겠다, 수업이 성사되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쓰자는 마음으로 아이디어를 정리했고, 그 아이디어가 수업계획서가 됐고, 1기 수업은 이제 2기로 이어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사태의 본질을 모르는 상태였다. 글쓰기 세계의 새로운 영역을 탐험할 수 있어 신난다는, 그 정도였을 뿐. 2기 수업 첫 번째 주제인 '한 해를 정리하는 글쓰기'를 위해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2022년 말의 기록을 발견할 때까지는.

"2021~2022년의 목표였던 새로운 시도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가장 나다운 일, 내가 잘하는 일을 하자. 책 읽기와 글쓰기. 그 길을 꾸준히 걷다 보면 어디론가 통하는 문이 열릴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돌고 돌아 나에게로 이어진 것을. 도서관 건립을 위한 봉사는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일이었다. 도서관 사업으로 센터가 폐관 위기를 벗어났고, 도서관이 안정되자 센터의 근본이었던 수업을 재개하게 됐고, 나에게는 새로운 문이 열렸으니까.


깨달음과 동시에 문은 순식간에 덩치를 불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성문으로 변했다. 혼자 아무리 몸을 던져도 열릴 사이즈가 아니다. 문화센터가 설립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 이전에, 나와 함께, 나 이후에 봉사하면서 센터를 유지하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합쳐져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모두가 달라붙어 도드래를 돌린 덕분에 비로소 성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다리였던 도개교가 내려가면서 건너갈 수 있게 됐다. 내가 잘나서 훌떡 열어젖힌 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기적이었던 것이다. 2022년 말의 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정원에 꽃이 만발하려면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고, 조력자가 필요하다. 한두 명이 아니라 흙과 물과 비료와 햇빛과 나비 역할을 해주는 조력자 군단이 필요하다."

내가 내 역할을 하는 동안 보이지 않는 조력자 군단 역시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거대한 문이었던지. 이걸 내게 열어 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투했는지.


문의 진짜 의미를 알고 압도된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나도,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일의 문을 여는 데 힘을 보태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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