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소개하는 글쓰기 2023.10.21
* 배경: 방송국 실내 스튜디오. 키 큰 조명들이 작열하는 가운데 무대 위에는 진브라운 색상의 가죽소파 세트가 놓였다. 고급스럽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길들인 듯한 사용감 덕분에 편안한 인상을 풍긴다. 소파 뒤로는 큼직한 책장이 있다. 중후한 서재와 거실의 중간 정도 느낌. 충분히 개인적인 공간인 동시에 폐쇄적이지 않다. 무대 앞쪽으로는 관객들이 어둠에 잠긴 채 숨을 죽이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진행자 S는 1인용 소파에 앉아 대본을 뒤적이며 마지막 점검을 한다.
* 장면 #1. J가 들어온다. S는 벌떡 일어나 맞이한다. 관객들이 함성과 박수를 보낸다. J와 S는 악수에 이어 가벼운 포옹을 나눈 뒤 자리에 앉는다.
S: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J: 초대해 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 장면 #2. 인사와 담소를 마치고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된다.
S: 본인의 재능을 언제 깨달으셨나요?
J: 재능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건 아니지만.. 처음으로 이야기를 지은 건 4살 때였어요. 소방차, 경찰차, 구급차, 그리고 뭐가 하나 더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아무튼 넷이 사거리에서 딱 마주쳐 서로 자기가 급하고, 자기가 맡은 일이 더 중요하니까 먼저 지나가겠다고 다투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는 동안 불은 번지고, 도둑은 달아나고, 환자는 죽어가고 대파국이 일어나죠. 엄마한테 이 얘기를 들려줬더니 어디서 듣거나 베낀 거 아니냐고 표절 의혹을 제기하길래 분해서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비슷한 동요가 있긴 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이야기를 지은 다음 그 노래를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S: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J: 저는 확고한 꿈이 있는 어린이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난 커서 뭐가 되겠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죠.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어린 나이에 진로를 확실하게 정하라는 쪽이 가혹하다고 생각해요. 어른들도 자기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다 알고 살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자기 재능을 일찍 깨닫고 갈 길을 정했다면 축하할 일이지만, 인생은 장기전이니까요. 끝까지 가도 명확한 답은 안 나오고, 자꾸 불어나는 질문만 한 보따리 이고 가는 여정인지도 모르죠.
S: 현재의 성과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나요?
J: 지금까지의 제 인생 전체요. 지난 시간과 경험, 사람, 어느 무엇도 낭비가 아니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이루어가는 중이고요. 그러니까 당장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침반은 우리 몸 안에서 착실하게 작동 중입니다. 나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믿고, 매일 꾸준히 걸음을 옮기세요.
S: 공상이나 상상에 빠지는 일이 자주 있으셨나요?
J: 당장 해야 할 일이 없을 때는 주로 상상을 하거나 백일몽을 꾸고 있었죠. 암울했던 고3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상상은 주로 모험담이었어요. 인간계의 소녀가 정령계로 소환돼서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를 듣고, 천계와 마계의 대표까지 만나 셋이 힘을 합쳐 투닥투닥하면서 세상을 구하기 위한 모험을 하는 내용이었는데.. 꽤 오랜 시간 캐릭터들의 이름이며 성격을 구체적으로 상상했지만, 정작 작품으로 구현하지는 않았네요. 기승전결을 가진 사건이랄 게 없고, 캐릭터성을 드러내기 위한 극적인 장면 위주로만 상상해서 그런 것 같아요.
S: 학창 시절에 현재의 모습이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J: 아뇨. 저는 속물적인 어린이였고 창작은 배고픈 직업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했죠. 학생 때는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했어요. 매일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떠나 호텔에 묵으면서 비즈니스를 성사시키는 사람이요. 집이 제일 편안한 지금의 제 모습과는 정반대의 이상이었네요.
현재의 저라서 다행이에요. 꾸준히 창작하기 위해 필요한 건 대단한 창의성이나 영감이 아니라 퇴근 후와 주말에 쏘삭쏘삭 글을 쓸 수 있게끔 받쳐주는 안정적인 데이잡이니까요.
S: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J: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한 사이였어요. 저는 예민한 어린이였고, 그분들은 부모 노릇이 처음인 데다가 당면한 인생의 과제를 헤쳐나가느라 분주하셨죠. 서로 이해를 못 하니까 마음의 거리가 멀었고요. 하지만 부모님이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저를 키우고 사랑했다는 걸 인정한 뒤로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화해했습니다. 제가 그런 줄도 모르시고, 아시면 우리가 너한테 못해준 게 뭐가 있냐고 화를 내시겠지만요 ㅎㅎ
S: 유년 시절, 특별한 경험이나 기억이 있으신가요?
J: 제 마음을 떠나지 않는 유년의 풍경에는 두부 장수가 있어요. 노을이 깔리면서 어쩐지 서글퍼질 무렵이면 두부 아저씨의 종소리가 딸랑딸랑 울려요. 그럼 집 앞에 나가서 아직까지 따듯한 두모 한 모를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오는데, 그 온기가 손안에 가득 차면 마음이 포근해지곤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유년의 풍경에 바다가 일상으로 자리 잡은 사람이 부러워요.
S: 내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J: 겸손이요. 하루키가 말했죠. 작가란 근본적으로 "내가 옳고, 너희 모두가 틀려먹었다"라고 생각하는 족속이라고. 전적으로 동의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랑 친구가 되기는 힘들잖아요? 작품 외적인 세상에서는 겸허해야죠. 늘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뼛속까지 오만한 인간이라 그런가 그게 참 어려워요. 그래도 노력은 계속합니다. 소통하고 싶고, 연결되고 싶으니까요.
S: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J: 어렵네요. 솔직히 자연인 J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쩐지 보자마자 싸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축적한 빅데이터가 발동하는 거죠. 하지만 창작인 J는 입체적인 인물들을 그려내니까요. 전 사연 없이 그냥 돌아버린 사이코패스 악당은 못 쓰겠더라고요. 그 사람도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과 사건이 있어야 말이 되죠. 모든 사람에게 맥락과 서사가 있다는 걸 믿는다면.. 자연인 J도 좀 더 편견에서 벗어나야겠네요.
S: 틀에 박힌 일상을 살면서 나를 잃지 않고, 내면을 더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J: 자기반성이요. 이 자리의 시작이 글인 것처럼 그 도구도 저에게는 글이에요. 결점 많은 인간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자부해요. 꾸준한 자기반성을 통해 나를 객관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거요. 물론 잘 안 되는 때도 많지만요. 자기객관화를 위해서는 자기반성이 필요하고, 저는 글을 통해서 그 목표를 위해 수련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평생을 수련하는 거죠. 하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게 돼요. 그게 바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가 아닐까요?
장면 #3. 카메라 줌인. J의 미소에 이어 고개를 끄덕이는 S를 비춘다. 이어 관객들의 얼굴이 화면이 담긴다. 이 소통을 통해 그들은 얼마나 연결됐을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연결선은 존재한다. 매일의 수련을 통해 선이 더욱 두터워지고, 선명해지는 날까지 오늘도 소통, 그리고 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