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글쓰기 2024.1.6
* 글쓰기수업의 수강생들과 함께 완성한 작품입니다. 제가 서두를 쓰고 수강생 분들이 돌아가면서 한 꼭지씩 작성한 다음, 각자의 결론과 제목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아래 공개본의 결론은 제가 쓴 버전입니다. 브런치 게재에 동의해 주신 분들의 경우 원문을 실었고, 동의를 얻지 못한 부분은 요약으로 대체했습니다.
#1
문이 열렸다.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과 벽면, 천장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온통 하얗다. 하늘을 볼 때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원근감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얼마나 작은지 혹은 큰지 가늠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수술실 같기도 하고 실험실 같기도 한 삭막한 풍경 속에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딱히 불만은 없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으니까. Garden 콘셉트를 골랐다면 파릇파릇한 잔디를 배경으로 연분홍색 작약, 청보랏빛 수국과 붓꽃, 크림색 장미가 한껏 흐드러진 꽃 정원에 티파티 테이블을 차려줬을 것이다. Cozy 콘셉트를 골랐다면 통나무집 안에 난롯불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팔걸이에는 뜨개질감이 걸쳐진 흔들의자를 준비했을 테고. 그가 개발한 가상현실 프로그램 '청자 베개'가 제공하는 선택지는 그 밖에도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그는 'Plain'을 선택했다. 이것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아니겠지만, 오늘은 어떤 눈속임에도 현혹되지 않은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힘겹게 몸을 내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생명 연장의 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박사님은 AI 생명윤리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 장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선정되셨습니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 적당히 톤이 낮고, 말이 너무 빠르지 않고, 다정한 느낌을 준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샘플링을 추출했겠지. 하지만 본질은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에 있기에 그는 다소 불쾌해졌다. 장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선정이라.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군. 기쁘다기보다는 가소로울 뿐이다. 내 가치를 판단해서 수명을 결정한다? 마치 너한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와서 AI가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저울질하는 게 옳은가를 따지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인간의 생명 연장 결정권이 AI에게 넘어간 지 20년도 지난 시점이다. 인간이 하면 부정과 비리를 피할 수 없다는 논리를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애초에 생명윤리위원회의 심사를 요청한 것은 그 자신이다. 그의 의지에 따라 심사했고 합격 판정을 내렸으니 '제멋대로'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이 새삼스러운 거부감은 AI가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그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아버지는 인류의 도약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 AI 전문가였다. 그는 한 번도 아버지를 실물로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는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라났다. 그의 성장기는 기나긴 친자확인 소송과 함께했다. 결국 그들의 부자 관계가 입증된 이후, 법정 밖으로 던져진 이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 편리한 시점이었다. 친자로 입증된 그에게 거액의 유산이 남겨졌고, 그걸로 스타트업을 차릴 수 있었으니까. 불운한 성장 배경을 감안하면 그가 가상현실에 빠져든 것도 이해가 간다는 둥 역시 아버지의 비상한 두뇌를 물려받아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의 수장이 되었다는 둥 지긋지긋한 헛소리를 평생 들어야 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여기저기 투자해 달라고 손 벌리는 대신 시간을 아껴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으니 이 정도면 공정 거래였다고 해야겠지.
"서류상으로 안내드린 것처럼 박사님께는 3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실은 자신이 정말 생명 연장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원하는 모든 것을 필요한 이상으로 누리며 살아왔다. 심해에 가고 싶으면 심해를 가고, 우주에 가고 싶으면 우주로 갔다. 돈이건 여자건 친구건 평생 부족할 일이 없었다. 물론 그 관계가 얼마나 진실한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돈에게 진실성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바라지 않았다. 그의 인생을 여기까지 끌고 온 동력은 사람이 아니라 욕망이다. 새롭게 원하는 것이 생겨,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할 때만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다양한 욕망을 충족한 인생이었고, 이제는 더 원할 만한 것도 없다. 마지막 욕망인 생명 연장을 제외하면. 정말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선택지를 다시 한번 요약해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대는 AI니까 한 번 아니라 100번을 더 말해달라고 해도 별 문제는 없다.
"1번은 트랜스휴먼, 인간의 몸에서 늙고 병드는 소모품을 신소재로 대체해 현재 자신의 육신을 유지하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2번은 디지털휴먼, 의식만 따로 분리해 클라우드에 업로드함으로써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이후 다시 육체를 원할 경우에 대비해 현재 육체를 냉동 보존하는 옵션도 가능합니다.
3번은 분리한 의식을 클론에 재이식하는 방법입니다. 스스로를 복제해 자신의 젊은 육체를 사용할 수도 있고, 정반대의 육체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박사님은 노년의 남성이니 이 경우에는 젊은 여성이 되겠군요. 단, 미성년자 클론을 사용하는 것은 윤리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클론의 나이는 20세 이후부터 설정 가능합니다."
이미 검토한 내용이다. 하지만 '젊은 여성'이라는 구체적인 예시를 듣자 언젠가 한 20대 여성에게서 받았던 쪽지가 떠올랐다. 너무 자주 펼쳐서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꺼낼 필요도 없이,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단언할 수 있을 거야.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바로 너였다고. 언제까지나 내 마음에 너를 간직할게. 너도 꼭 그렇게 나를 간직해 줘. 이 세상 무엇도, 누구도, 시간마저도 그걸 변하게 할 수는 없어. 우리는 영원히 이어져 있어.
그게 도대체 어떤 마음인지 평생을 모르고 살았다. 젊은 여자의 몸으로 2번째 인생을 살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클라우드와 합일돼서 삼라만상에 통달하면 그때 이해하게 될까. 아니면 내가 나인 채로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우리 사이의 영원한 연결이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유효한 것일까. 긴 한숨의 끝에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했소. 내 선택은..."
#2
"내 선택은… 나의 의식을 분리하여 다른 몸에 이식하는 클론이야."
그는 20살의 청춘 남자의 몸에 자신의 의식을 클론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오늘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 가지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하지 않고서 왔었다. 하지만 AI가 옵션을 하나하나 다시 설명하는 동안 왜인지 모르지만 젊은 시절 연인이었던 그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을 진심으로 이해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이미 살아온 삶을 연장하는 판국에 이왕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내가 놓친 삶의 순간들을 그 순간의 육체와 더 성숙하고 노련한 의식으로 맞이한다면 분명 200% 이해가 더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선택이 과연 최선의 방법일까? 생명의 연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어서 나는 선택받은 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판국에 내가 하는 결정이 과연 최선일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럼 지금부터 동의서 작성을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AI는 처음 그가 들어섰을 때처럼 적당히 명쾌하지만 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닌 중립적인 톤으로 클론 선택에 따라오는 동의서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면서 그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구두 동의를 요구했다. AI는 중요한 부분이 나올 때면 그에게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니 심사숙고하라는 충고까지 놓치지 않았다.
"사용자의 잘못으로 클론의 몸에 치명적인 피해가 생기거나, 또는 불의의 사고로 생명연장이 끝나는 것은 자사의 책임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 동의하시나요?"라고 AI는 물었다. 그는 동의의 표현을 짧게 했다.
"하지만 시술 후 1년 이내에 클론된 육체에 예상치 못했던 질병이나 오류가 생길 경우에는, 자사의 능력하에 가장 비슷한 육체로 다시 클론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생명 연장의 욕망에 이끌려, 가지고 싶은 것들은 꼭 가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살아온 그였지만 행여 복제된 육체에 복구 불가능한 문제가 생겼을 경우, 또 다른 육체로 의식을 옮겨가면서까지 더 살고 싶은 욕구가 그때도 지금과 같을까? 어쩌면, 젊은 육체에 성숙하고 노련한 의식이 탑재된 자신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생활하다 보면 그 매력에 취해 살고 싶은 욕구가 더 불어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에 잠긴 그에게 AI는 대답을 요구했다. 그는 짧게 동의한다고 답했다.
한 시간가량 AI는 쉬지 않고 동의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모든 서류에 동의를 하고 나자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들어 그는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감을 느낄 수 없는 백색의 가상공간은 그가 지금 느끼는 피로감을 두 배로 느끼게 했다. 자신이 지금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들게 했다. 차라리 초록색의 정원을 배경으로 택했다면 지금 이 순간 자연에서나마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위로를 얻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의 후회는 이미 늦었다. 그녀를 그때 그렇게 놓친 것처럼…
그때의 그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추앙하던 그녀를 왜 떠나야만 했었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연인과의 관계가 희미해져 갈 때면 그는 항시 그때의 그 기억을 떠올렸다. 부정당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것도 친부에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서러움, 두려움과 외로움은 마음속 한구석에 아주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아서, 그의 모든 인간관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런 큰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과연 내가 몸만 20살로 돌아간다고 해서 나의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3
클론 이식까지 5시간 정도가 남아 있다. 많은 생각을 뒤로한 채 그는 '청자 베개' 프로그램 도우미인 '자넷'에게 무심히 지시한다.
"자넷, 난 이제 좀 쉬고 싶어요. MOR24번으로."
"네, 박사님."
짧은 그녀의 대답과 함께 순식간에 공간이 변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하얀색 방이 아니라 저 멀리 노을이 지는 끝없는 바닷가가 보이는 비치체어에 앉아 있다. 천천히 모래를 쓰는 파도소리와 뒤편에서 잔잔하게 들리는 기타 소리가 그의 지친 심신에 편안함을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편안한 광경도 조금 전에 떠올린 그녀의 기억을 지우지는 못한다.
그녀를 놓친 그날 이후, 그녀의 대한 집착과 환상은 젊은 시절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그녀를 대신할 욕망을 찾아 많은 나라들을 떠돌았으며 깊은 심해, 심지어 우주까지 다녀 보았다. 그가 본인의 일에 매진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그녀였다. 그는 오로지 그녀를 기억 속에서 잊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다른 많은 여인들을 만나 왔다. 그녀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여성 중에 하나로 생각하고 철저히 무시해도 보았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자 결국 그는 40년 전, 그의 마흔을 앞두고, 그녀의 상세 정보를 기억에서 차단시키는 의사의 소견과 법원의 판단을 받아 그녀의 모든 부분에 덮어씌우는 부분뇌기억차단 수술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그는 이제는 그녀와의 기억 속에서조차 그녀의 이름을 기억할 수도, 얼굴을 볼 수도 없지만, 오늘도 여전히 그녀가 준 쪽지의 문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해내왔다. 그는 긴 침묵으로 바닷가를 바라보다 긴 한숨과 함께 마음을 정한다.
"자넷."
"네, 박사님."
"... MOF12로."
이제 그는 10평 남짓한 어느 조그만 도서관 2층의 사서 자리에 앉아 있다. 도서관은 통일되지 않은 색상과 형태의 책 선반들, 무언가 조잡한 느낌의 탁자와 테이블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깔끔한 화이트 느낌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 그의 앞 책상에 놓인 조그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피아노 소리 외에는 저 멀리 창문으로 보이는 노을의 고요함에 그는 시간이 멈춘 느낌을 받았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며 그중에 하나가 그녀임을 안다. 1층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계단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곧 도서관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테이블에 그를 포함하여 6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그들의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다.
모임이 끝이 나고 모두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갈 때쯤, 그녀가 그에게 다가온다.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고 있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고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또렷하다. 그녀의 눈빛은 지금의 박사를 꿰뚫고 있는 듯한 눈빛이다. 그리고, 꿈에 매번 나와서 잊지 못하는, 그녀가 전달하는 쪽지.
#4
- 박사의 클론 이식 작업이 완료됨
- 젊고 잘 생긴 청년이 된 박사는 젊은 취미를 갖기로 결심하고, 산악자전거 동호회에 가입
- 첫 모임에서 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고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됨
#5
아, 여기는 어디인가? 혼미한 의식을 가다듬으며,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다시 흰색의 벽과 천장,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줄이며, 깁스되어 고정된 몸과 팔, 다리. 한기가 부르르 온몸에 밀려온다. 다시 한번 찬찬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본다. 클론 이식으로 얻은 21살의 멋지고 젊은 몸으로 산악자전거의 스릴을 즐기고 있었지. 젊어진 몸으로 인해 하늘 끝까지 충천된 기분이었고, 어떤 것이든 해낼 것 같은 자신감이 솟구쳤었지. 이런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준 과학의 위대함과 돈의 매력에 한껏 찬사를 보내며, 나는 페달을 열심히 밞았었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극렬한 통증과 급하게 달려온 119의 사이렌 소리, 진통제 투입과 함께 나른한 잠으로 빠져들었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허둥지둥 수술실로 급직행했었다.
"환자분? 설명 들으셨죠? 자, 여기가 요렇게 부러졌습니다. 이건 수술을 피할 수가 없는 부위고요... 마침 교수님 수술 스케줄이 가능해서 천운입니다." 수술은 철심을 고관절 방향에 하나, 부러진 관절 머리 쪽으로 하나, 기억자로 심어서 뼈가 잘 붙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리곤 다시 의식이 마비되었다. 수술 후 경과를 지켜보면서 서서히 재활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도 떠올랐다. 안개가 자욱하게 걷히듯 하나하나 상황들이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생각은 자유로운데, 손가락 발가락 하나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몸의 통증보다도, 그는 며칠사이에 일어난 극과 극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혼돈스럽기만 하였다.
"사용자의 잘못으로 클론의 몸에 치명적인 피해가 생기거나, 또는 불의의 사고로 생명연장이 끝나는 것은 자사의 책임이 아닙니다."
클론 이식 시 AI 가 강조했던 말도 상기되었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책임소재는 의미가 없지. 그는 앞으로의 긴 재활운동 후 다시 20대의 몸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이런저런 두서없이 스치는 생각 끝에 그는 화들짝 전기 쇼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낡은 쪽지, 그가 위험을 불사르면서도 붙잡고 싶었던 그녀의 마지막 쪽지에 이르자 그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단언할 수 있을 거야.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바로 너였다고. 언제까지나 내 마음에 너를 간직할게. 너도 꼭 그렇게 나를 간직해 줘. 이 세상 무엇도, 누구도, 시간마저도 그걸 변하게 할 수는 없어. 우리는 영원히 이어져 있어.
쪽지의 내용은 이미 그의 마음과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굳이 낡은 종이를 잃어버려서 못 찾는다 하여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나 그 쪽지에 배어 있을 그녀의 향기나 손길의 흔적은 긴 세월 속에서 박제되어 그 쪽지에 남아 있을 듯하여, 그는 그 쪽지가 하염없이 그리웠다. 그가 젊은 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그녀의 마지막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었음임을 깨우치면서,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몸이 아프고, 재활운동의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일쯤이야, 80년 넘게 살았던 박사에게는 그런 것쯤은 그닥 절망적이진 않았다. 인생이란 밀물과 썰물처럼, 악재와 호재가 늘 빈번히 교차한다는 것은 이미 터득했고, 더군다나 80년 넘게 충분한 삶을 살아봤으니... 그런데 이 극심한 몸의 아픔보다, 더 강렬한 통증은 너무나 소중한 무언가를 알지도 못했고, 아니 알려하지도 않았고, 진주를 짓밟는 돼지와 같이, 무참히 버려버린 자신의 못난 선택과 어리석음이었다.
그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같은 삶을 살던 어린 시절, 여기저기 위탁가정을 전전하면서, 분노와 저항감이 자라는 키의 몇 배속이 되어 휘몰아칠 때도, 그 아이는 언제나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소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해 주었고, 그 어린 소년이 알지 못했던 그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해서 늘 종달새처럼 되뇌어주었다.
"너는 어쩜 그리 영리하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참 대단해."
"너의 눈은 늘 꿈꾸는 별과 같아, 어쩜 그리 많은 생각을 담고 있니."
"너는 너무나 특별해서,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엄청난 일을 해낼 거야."
"너를 보고 있으면, 나마저도 특별해지는 것 같아, 늘 기분이 좋아."
소녀의 재잘거림에 그는 언제나 ‘뭐라는 거야, 제까짓 게 뭘 안다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식이었다. 하루하루의 고달프고 힘든 시간 속에서 그렇게 소녀와 소년은 티격태격, 토닥토닥, 앙증맞은 강아지들처럼, 함께 자라왔다. 외롭고 친구가 없던 그에게, 늘 미소로 다가와 다정스레 챙겨주는 그녀는 자연스러운 공기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를 멀리하게 된 건 아마도 거액의 유산을 받은 뒤였을 것이다. 그렇게 갈망했던 것들이 돈으로 쉽게 해결되는 경험들을 하면서, 그는 힘들게 가난 속에서 버텨온 어린 시절이 너무 억울했고, 이 세상이 한편 허무하고 우스워 보였다. 그래서 그는 돈들을 지키고 더 불리기 위해서, 가진 자들의 세계에 진입하기로 하였었다.
그 세계의 룰을 따르기 위해, 그는 가난했었던 티를 내서는 안되었고, 그의 모든 과거를 부정해야만 했다. 소위 디지털휴먼과 같이, 그의 의식과 실체를 분리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세계의 라이프 스타일은 절대 속을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되고, 늘 우아하고 고상하고, 젠틀하고 스마트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주위에는 아름답고, 지적이고, 우아한 여인들이 줄을 이었고, 그가 손만 내밀어도 쉽게 손을 잡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여자들은 그의 소유물들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저 매끈한 람보르기니, 너무 아름다워요."
"이 나이에 이런 규모의 사업을 하시다니, 너무 대단하셔요."
그는 여인들의 입에 발린 어떤 말에도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누가 자기의 장식품에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단 말인가. 단지 발판을 삼아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런 그에게 여전히 청순하고, 변함없이 다정한 그녀는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빨리 벗어던져내야 하는 낡고 누추한 옷 같은 존재가 되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깊은 회한들이 해일처럼 북받쳐왔다. 부와 명예를 향해 열심히 달려왔던 지난 80년의 세월, 남들이 추앙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려봤으나,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은 놓쳐버린 빈껍데기의 시간이었음을. 그의 의식은 끊임없이 그녀의 존재를 부인하고 추방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의 상세정보마저 지워내는 작업을 했었다. 그러나, 그의 깊은 무의식은 그녀를 강렬하게 원했고, 다가가고 싶어 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병실의 공기가 눅눅하게 그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런 응급상황에 급하게 달려와 그를 챙겨주거나, 살뜰하게 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공간이 너무나 익숙한 그지만, 오늘밤은 몹시 외로웠다. 통증과 함께 간간이 떠오르는 지난 세월들을 반추하면서, 그는 새롭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클론 이식 후, 젊은 몸으로 뭐든 해낼 것 같았던 그 충만했던 자신감은 왠지 아득한 옛이야기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단함의 연속이었는지, 늘 바빴고, 불안했고, 기쁘고 행복한 순간들은 가뭄에 콩 나듯 했었다는 게 새삼 떠올랐다. 그런 삶을 되풀이하려고 한 자신이 문득, 토한 것을 다시 먹고 있는 돼지 같다고 생각되었다.
#6
다음 순간, 그는 백색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텅 빈 공간 속 덩그러니 놓인 의자 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눈을 껌뻑이며 주변을 둘러본다. 열 손가락을 다시 움직여본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보니 다리도 멀쩡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더는 가볍지 않다. 다시 80대 육신을 입은 노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원점. 찌뿌둥한 몸을 의자에 부려놓고 숨을 고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클론 옵션 체험 프로그램이 종료됐습니다." 자넷이었다.
"체험 프로그램?"
"예, 바로 옵션을 실현할 경우 박사님처럼 새로 받은 육체를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아서, 얼마 전부터 각 옵션별 체험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박사님이 개발하신 청자 베개 덕분이죠. 원하신다면 디지털휴먼과 트랜스휴먼도 시뮬레이션이 가능합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처럼 생생한 꿈이었다니. 하지만 두 번째 삶이 끝장나는 순간, 비로소 자신이 찾아야 할 의미, 삶의 목적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가진 첫 번째 삶에서 끝내지 못한 숙제. 그녀를 되찾아야 한다. 몇 번을 더 살더라도 결론은 같다. 그는 그녀를 되찾아야 했다.
"추가 체험은 필요 없고, 기억복원술을 받고 싶소. 기억차단술로 봉인한 내 기억을 되찾게 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박사님. 해당 기억을 복원해서 가상현실로 재생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잔뜩 심통이 난 어린애. 골목에 모인 아이들은 서로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엄청 힘이 세. 저번에 등산 가서 날 목마 태운 채로 산 꼭대기까지 올라갔어!"
"우리 아빠는 곰도 이길 수 있어. 아빠가 사냥총으로 쏘면 한 방에 끝이야."
그의 차례였다. 아이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무언의 압박이 무겁다. 묵직한 돌덩이가 가슴을 내리누르는 듯 점점 호흡이 얕아지고 빨라진다.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는..."
이건 비밀이라고 했는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소리친다.
"천재야! 학교에서 선생님 대신 수업해 주는 AI도 우리 아빠가 만든 거야!"
잠시 조용해졌다가 비웃음이 침묵을 깨트렸다. 사방에서 돌팔매 같은 비난이 와르르 쏟아진다.
- 거짓말 마, 이 땅꼬마야.
- 너네 아빠가 그렇게 대단하면 넌 왜 여기 사는데? 저 언덕 꼭대기에 비싼 집으로 갔어야지!
- 얘, 아빠도 없어. 우리 엄마가 그랬어. 얘네 엄마는 미혼모라고.
- 미혼모가 뭔데?
- 결혼 안 하고 애 낳은 여자.
아이들의 조롱은 주먹다짐으로 막을 내린다. 그는 멍이 들고 코피가 터진 채로 집에 돌아와 씩씩대면서 코딩을 짠다. 그의 유일한 안식처.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에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숨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과물을 돌려 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와, 대단하다.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야? 넌 정말 천재인가 봐!"
그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거짓말하지 마!"
그리고 길거리로 뛰쳐나갔다. 내가 천재라는 것도, 아빠가 천재라는 것도 다 거짓말이야... 정말 아빠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면, 내가 아빠 닮아서 천재라면... 왜 만날 수 없는 건데? 왜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건데? 어두워질 무렵 그를 찾아낸 건 또다시 그녀였다.
다음 장면은 도서관이다. 그는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마을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무료 글쓰기수업에 그녀와 함께 앉아 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틈에서 그녀의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는 그녀가 부끄럽고 싫었지만, 정작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다. 수업에 집중하고, 숙제를 꼬박꼬박 해가고, 가장 많은 질문을 한다. 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날은 주차장으로 가다가, 노트북 충전선을 깜빡한 게 생각나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목소리.
"선생님, 이거 제가 쓴 카드인데 한 번 봐주세요. 그 애가 좋아할까요?"
은퇴한 교사 출신의 깐깐한 할머니가 쪽지를 받아 읽었다. 달랑 쪽지 한 장일뿐인데 침묵이 오래 이어졌다. 할머니가 안경을 벗더니 눈물을 닦는 것을 훔쳐본 그는 깜짝 놀랐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할망구가 울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대체 저기 뭐라고 쓰여 있길래. 할머니는 그녀에게 쪽지를 돌려주며 말했다.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니 행복한 인생이네요. 그리고 이런 사랑을 줄 수 있다면... 그건 결코 헛된 삶이 아니에요."
할머니와 그녀가 서로 포옹했다. 며칠 뒤, 그의 생일. 그녀가 쪽지를 내밀었다. "생일 축하해." 그는 호기심에 쪽지를 읽고, 곧장 내던져버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뭐가 영원히 이어져, 지긋지긋해. 그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만큼 동경했다. 아버지에게 부정당한 그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리고, 가난하고, 못 배우고, 비천한 여자를 버리고 싶어서 한사코 그녀를 밀어냈다.
그 쪽지는 다시 그의 손에 돌아왔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병상에서. "날 잊어도 좋아. 하지만 이건 간직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 그는 쪽지를 받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고개를 돌렸다.
그 이후로 그녀를 지우며 살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뒤에도 그런 사랑은 받을 수 없었다. 그의 돈도, 능력도, 외모도 아닌 그 자체를 진정으로 사랑한 한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아무리 많은 욕망을 이루어도 그 상실을 돌이킬 수 없고, 아무리 많이 가져도 함께 나눌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고, 나는 그녀가 아니라 당신에게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그녀를 버렸지만, 그 아버지마저 친자소송 판결 직후에 죽어버렸다. 몇 번을 다시 살아도, 설령 영원히 산다고 해도 그가 원하는 것은 가질 수가 없게 됐다.
그는 너덜너덜한 쪽지를 다시 펴서 읽는다. 그토록 지우려 했지만 여전히 유효한 연결을 실감하며.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단언할 수 있을 거야.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바로 너였다고. 언제까지나 내 마음에 너를 간직할게. 너도 꼭 그렇게 나를 간직해 줘. 이 세상 무엇도, 누구도, 시간마저도 그걸 변하게 할 수는 없어. 우리는 영원히 이어져 있어.
지금도 그 사랑을 느낄 수가 있다. 희미하게, 그러나 생생하게.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불러본다. 어머니. 그의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흐른다. 손도, 발도, 명석한 두뇌도, 낡고 지친 육신의 모든 것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가운데 그 눈물만은 뜨거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