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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Nov 11. 2023

[수업] 고통을 선택하라

좌우명 글쓰기 2023.11.4

행복이란 늘 잡히지 않는 화두였다. 사람이 어떻게 맨날 행복하나, 무리하게 매일 행복해야 할 필요가 있나, 라고 하면서도 실은 행복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하나하나 곱씹어보고, 이렇게 많이 가졌는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지, 그럼 뭘 더 가져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했다. 그렇게 행복을 고민할수록 더 고통스러워졌다. 왜 안 행복한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를 떠올리는 것부터가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건 매 순간 스스로의 귓전에 대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넌 행복하지 않아! 뭐라도 좀 해 봐! 언제까지 이렇게 불행하게 살 작정인데!


그즈음, 조 디스펜자를 알게 됐다. 사람들이 왜 불행한지에 대한 그의 진단은 통렬하고 예리했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현재를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다. 가령 오늘의 나에게 불쾌한 일이 일어났다. 사무실에 출근했더니 부장이 씩씩대면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을 이 따위로 하느냐며 서류 뭉치를 내던졌다. 물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는 하루종일 충격 속에 살다가 집에 가서도 계속 그 생각을 한다. 부장의 폭언과 죽은 새처럼 발치에 떨어지는 종이들과 지켜보던 이들의 경악한 눈빛, 속닥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때마다 나는 다시 과거로 소환된다. 뇌는 내가 지금 이 순간 그 일을 겪고 있는지,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아드레날린을 펑펑 쏟아낸다. 뇌의 비상신호를 수신한 육체는 공격을 맞받아치거나 달아나기 위한 방어기제를 발동하고, 나는 한밤중에 이불을 차던지며 벌떡 일어난다. 이렇게 트라우마가 형성된다. 과거의 고통을 현재로 끌고 와서 수십, 수백번을 다시 체험하며 신체를 비정상적인 각성 상태로 몰아넣는다. 몸과 마음이 배겨날 도리가 없고, 성장의 물꼬가 틀어막힌다. 그 일이 일어나고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10년 전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디스펜자의 답은 과거와의 연결을 끊고 현재에 존재하기 위해 명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명상은 점점 스케일이 커져서 ‘나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그걸 가지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순간 우주가 나를 위해 준비한 다양한 선택지에 제약이 걸리기 때문에, 나는 이미 가졌다는 만족과 기쁨 속에 살아가면서 실제적인 작업은 그저 우주에 맡겨야 한다. 그의 진단을 신뢰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아무래도 이건 정신분열증으로 가는 쉽고 빠른 길 같았다. 나는 당장 다음달 렌트비가 없지만, 우주가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까 오늘 친구들을 불러모아 저녁을 쏘라고? 나는 이미 부자라는 걸 뼛속까지 믿으며 부자가 된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그의 가르침을 내면화하기는 어려웠다.


디자펜자 행복론의 모순에 발목을 잡혀 주춤하던 중, 새로운 스승이 나타났다. ‘도파민 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 이 책에는 행복을 찾으려고 발버둥치다 중독의 늪에 빠진 환자들의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는데, 행복하기 위해 모든 고통으로부터 달아나 쾌락만 누리고 산 사람들은 적당히 고통을 참으면서 사는 사람들보다 더 지독한 불행에 곤두박질쳤다. 애나는 your choice of drug/pai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의 도피처가 있다. 어떤 사람은 게임을 하고, 어떤 사람은 유튜브를 보고, 어떤 사람은 쇼핑을 한다. 하지만 어떤 약이라도 남용하면 뇌의 보상체계가 망가지면서 점점 더 강도를 높여야 간신히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중독된 이후에는 약을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약을 안 하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답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에 있다. 정확히는 쾌락과 고통 사이 균형의 회복. 인생에서 고통을 제거하려고 쾌락의 스위치를 누르면 뇌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통 쪽에 무게를 추가한다. 원하는 대로 하루종일 유튜브만 실컷 보고 뒹굴었는데 저녁이 되면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고통의 스위치를 누르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행복의 무게추가 내려간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선택해야 한다. 어차피 고통을 배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고통을 선택해야 할까. 좀 더 가치 있는 고통, 그 고통을 참고 견뎠을 때 더 큰 보상이 주어지는 고통을 골라야 한다. 겨울 새벽, 따스한 침대를 벗어나 출근 길에 오르는 것은 고통이다. 회사에서 잘리고 노숙자가 되어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고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더 상위 고통인 출근의 고통을 선택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고통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게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의 의미, 이 고통을 지불함으로써 주어지는 보상을 알고 기꺼이 고통을 수용할 때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온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가시밭길이자 무릉도원인 글쓰기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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