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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Dec 05. 2023

[수업][초단편] 달의 연인

다른 예술에서 영감 받아 글쓰기 2023.12.2

달은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에서, 가끔은 달빛조차 사라진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찬란한 햇살은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과 선의를 불어넣는다. 대낮의 사람들은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했고, 이들의 미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달에까지 닿았다. 하지만 칠흑같은 어둠이 내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달이 제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세상의 미담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 탐욕, 이기심뿐이었다. 도시의 토사물처럼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인간들은 밤새 분주히도 쏘다녔다. 자신들의 죄악을 밤하늘에 묻고 또 묻으며. 


지옥도 같은 세상에 신물이 나서 눈을 감고 싶어질 무렵, 한 소녀가 나타났다. 소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달은 모든 것을 잊었다. 한 떨기 들꽃처럼 희고 청초한 얼굴에 가녀린 자태는 달빛으로 자아낸 듯이 섬세하다.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채가 어찌나 반짝이던지, 손 안에 꼭 쥐면 빛으로 부서질 것만 같다. 소녀는 달을 닮았고, 가슴 속에는 달처럼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마 전 어둠 속에서 살해 당한 남자의 딸이었다. 그가 죽던 날에도 달은 여느 때처럼 모든 것을 지켜봤다. 그의 딸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소녀는 턱끝까지 슬픔에 잠겨 따듯한 손길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왈칵 아픔을 쏟아낼 것 같았다. 그녀에게 전할 온기가 없었던 달은 대신 조심스러운 달빛을 건넸다. 눈물이 한 방울씩 넘칠 때마다 환한 달빛이 그 빈 자리를 채웠다. 차츰 눈물 대신 달빛을 머금게 된 소녀는 광원을 찾아 고개를 들었고, 달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한쪽은 말하고 다른 한쪽은 듣기만 하는 대화였지만.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달은 그녀를 알아갔다. 그녀는 겉모습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마음씨도 고왔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 복수하겠다는 원한 따위는 없이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을 깊이 애도할 뿐이었다. 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소녀처럼 선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만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런 소녀들은 주로 태양의 영역에 머물렀기에. 


묵묵히 들어주는 달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소녀는 조금씩 고통에서 벗어났다. 오래지 않아 그녀에게는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이렇게 달을 만나는 것.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날이 저물면 집 밖으로 나와 달빛을 쬐는 것. 당신은 하늘에, 나는 지상에 있지만 서로를 마주 보는 한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실감하는 것. 당신이 매일 충실하게 밤을 지키는 것처럼 나는 낮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 태양은 모두의 태양이지만 달은 이제 나만의 달이다.


달과 그의 연인은 사랑에 빠졌고, 달밤은 평화로웠다.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그 일을 사고라 부를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혹은 그녀가 스스로 세상을 버릴 작정이었다고 떠벌리겠지. 뭐라도 아는 것처럼. 멍청한 인간들, 지긋지긋한 쥐새끼들. 잠들었던 증오가 다시 불길처럼 타오른다. 달은 인간 종족을 뼛속 깊이 경멸하고 혐오했다. 그들은 무지하고 무심하며 탐욕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는데, 특별했는데. 왜 돌멩이처럼 흩어진 그들이 아니라 홀로 진주처럼 영롱한 그녀여야 했을까. 달이 그토록 애틋하게 품었던 한 사람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사고로 치부하는 돌멩이들만을 남긴 채. 


달은 알았다. 그녀가 떠날 생각이 없었던 것을. 그를 버리려 하지 않았던 것을. 소녀가 죽던 밤에도 달은 모든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당신이 내게 남은 의미라고 속삭이고, 하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춤을 추었다. 오직 그만을 위해서. 달그락대는 자갈들의 반주에 맞춰 사뿐히 내딛는 걸음이 이어졌다. 강이 노래를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가 흥얼대는 콧노래에 물소리가 졸졸 화음을 넣었다. 소녀는 강 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강은 곧장 수면 위로 달그림자를 펼쳐 보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새빨간 사과를 내미는 마녀처럼. 소녀는 홀린 듯이 다가가 달을 만져보려 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실체 대신 달의 그림자를 품에 안으려 했다. 다음 순간, 본색을 드러낸 강이 그녀를 송두리째 삼켰다. 달은 소리 없이 절규했다. 짧은 탄식 같은 물거품이 올라왔지만, 강의 손은 그녀의 입을 막고 아래로 아래로 깊이 끌어내렸다. 세상의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범인은 강이다! 강은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을 집어삼켰다. 어둠의 공모자가 되어 추악한 진실의 증거를 감추곤 했다. 사채업자가 차 트렁크에서 꽁꽁 묶인 고객을 꺼내 던져넣을 때도, 아버지의 유산에 눈이 먼 동생이 형을 죽이고 시체를 가라앉힐 때도. 지금도 강바닥에 누워 물 밖으로 못 나오고 있는 그 형은 바로 소녀의 아버지였다. 달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그때마다 슬쩍 구름을 끌어다 눈을 가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달은 이제 방관자가 아니라 어둠을 몰아내는 고발자였다. 시린 달빛이 펑펑 쏟아져 세상을 대낮처럼 밝혔다. 거기까지였다. 달에게는 강으로 뛰어들 다리도, 구조를 위해 뻗을 손길도, 진실을 외칠 목소리도 없기에,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포만감에 조용해진 강 위로 무력한 눈물이 떨어진다. 물결에 흔들리던 달그림자가 산산이 부서진다. 


진주를 잃은 달은 납덩이 같은 허무를 품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 이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준 작품: Hijo de la Luna (달의 아들) by 포레스텔라 
* 이 글을 읽고 영감을 받은 작품 by jodie_park1111(인스타그램 아이디)

 

p.s.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면서 고리가 하나씩 만들어지고 길게 이어집니다. 그 특별하고 소중한 연결을 실감하게 해 준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당신 덕분에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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