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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Oct 27. 2023

언어와 세계와 통역

봉준호 통역사 샤론 최에 대한 단상

봉준호 통역사로 유명해진 샤론 최. 아마 통역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샤론이 나온 유튜브 영상을 클릭해 보지 않았을까? 과연 얼마나 잘하는지, 나랑은 뭐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영상을 보고 2가지를 알았다.

1. 저 사람은 전문 통역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지 않았구나

: 실제로 봉준호 감독 이전에는 이창동 감독을 위한 일주일이 통역 경험의 전부라고 한다.

2. 언어적인 감각 - 특히 영어 - 이 몹시 탁월한 사람이구나


실제로 어떤 말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봉 감독이 한 말을 나도 바로 영어로 옮겨 본 다음 실제 통역한 내용을 들었더니, 샤론의 원어민적 감각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령 "이 증상은 말기에 발견된다"는 말을 영어로 옮길 때, 한국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The symptom is found a little too late."라고 하겠지만 영어적 감각으로는 "The symptom goes undetected until it is too late."라고 표현한다. goes와 undetected는 별로 어려운 단어가 아니지만, 이런 식의 결합이 아무래도 낯선 것이다.


샤론은 후자와 같이, 원어민적 감각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전자처럼 말해도 의미는 통하지만, 후자가 더 정확하게 꽂힌달까. 그래서 원어민적 표현력이 부족한 통역사는 의미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더 많은 말을 한다. 한 마디로만 끝내면 상대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까 봐, 자꾸 부연 설명을 붙이게 된다. 통역사의 실력은, 얼마나 효과적으로(의미 손실이 없이) 그리고 경제적으로(적은 말로) 전달을 하느냐에 달렸다. 한 마디를 한 마디로, 정확히 전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다. 효과와 경제성은 비단 통역뿐 아니라 소통 전체에 해당되는 원칙이다. 한 마디만 해도 정확히 꽂히면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통번역에서는 출발점이 되는 언어를 source language (SL) / 도착점이 되는 언어를 target language (TL)라고 한다. 원칙은 TL이 모국어여야 한다는 거다. 가령 영-한 통번역은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 한-영은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하는 게 맞다. 듣고 이해하는 것보다, 그걸 내 속에서 재구성하고 의미를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다른 형식의 결과물로 산출하는 쪽이 더 어렵다는 뜻이다.


최근 10번째 출간작을 탈고했다. 여기에서 한 언어란 곧 한 세계다. 잊혀진 언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쓸 수 있는 언어라는 세계에 갇힌 주인공은 신호를 보낸다. 누군가 받아 줄 것이라는 희망 없이도, 그 언어를 쓰지 않고서는 / 그 세계를 외면하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신호에 이끌려 동족이 나타난다. 이건 하나하나의 세상과 그 세상이 보내는 신호, 희망과 절망,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가는 이중언어 환경과 통역사라는 직업에 대한 고찰도 담겨 있다. 통역사의 기본 역할은 conduit / 속이 빈 관이다. 나를 비우고 남의 생각과 감정을 내 속에 담는 것은, 일종의 접신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타인이 잠시 나를 관통하고, 그 자리를 떠나면 싹 지워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하지만 그 관에는 찌꺼기가 쌓인다. 생각과 감정의 잔여물이 남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봉 감독은 통역 일에 대해 "신성하다"는 표현을 사용했던 걸까. 신성한지는 모르겠지만, 진 빠지고 복잡한 일인 건 틀림없다.


샤론의 기고문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한 가지 언어로 사고의 틀을 확립하지 못해 이미지 / 영상 언어에 끌리게 됐다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다. 나는 영어를 쓰는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내 사고 체계를 쌓아 올린 벽돌은 확고하게 한국어다. 과연 인간이 그 틀 없이도 살 수 있는 걸까? 직관적인 깨달음을 얻어도 반드시 언어로 재정리를 해야 하는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머릿속 생각으로, 말로, 혹은 글로 정리를 하면서 깨달음은 가지를 뻗는다. 소설을 쓸 때와 마찬가지다. 직접 손을 대서 굴려 보기 전에는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일. 답이 없는 것 같다가도 언어로 차곡차곡 정리를 하면, 어느새 손이 결론으로 달리고 있다.


그런 프레임을 떠난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이미지의 세상은 중력을 벗어난 것처럼 자유로울까? 사람은 땅을 딛고 살아야 한다, 는 고정 관념을 버린 대신 하늘을 날게 된 것일까. 언어로 모든 것을 되새김질하는 내 습관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구식인지도 모른다. 이미지로 사고하는 신인류는 거칠 것 없이 자유롭고, 직관적으로 번개처럼 꽂히는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신이 될 방법을 찾았다. 인간 세상에 대한 모든 애착을 끊으면 가능한 일이다. 그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웠다. 하지만 사랑 없이 해탈하면 무얼 하나. 지지고 볶고 울고 웃는 쪽이 더 행복하다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줄곧 연애 중독자로 살아가고 있다. 좋을 때는 머릿속에서 오르골이 돌아가고, 안 좋을 때는 우물 밑바닥에 잠기는 드라마틱한 나날.


그때처럼 기로에 놓인 기분이다. 언어를 버리면 나는 더 홀가분해지겠지. 하지만 이토록 내 속에 파고든, 존재를 바쳐 사랑하는 상대를 버릴 수 있을까. 한국은 떠나도 한국어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신인류의 행보를 지켜보는 수밖에. 그들이 어디까지 날아가, 어떤 성취를 이룰지가 몹시도 궁금하다. 내 작은 언어의 감옥에 갇힌 나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펼쳐 주기를.


[샤론 최 기고문에서 발췌 및 번역] https://variety.com/2020/film/news/parasite-bong-joon-ho-interpreter-oscars-sharon-choi-1203505571/

어린 시절 미국에서 보낸 2년은, 나를 미국인이 되기에는 너무 한국적이고 한국인이 되기에는 너무 미국적인 '변종'으로 바꿔놨다. 심지어 나는 교포도 아니었고. 한국에 와서도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영어 실력을 유지했지만 정작 대학생이 되어 LA로 돌아갔을 때, 나는 그 흔한 인사인 "What's up?"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과, 내 절반만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두 가지 언어를 넘나드는 것은 내 직업이 아니라, 내 인생 그 자체였다. 나는 지난 20년간, 스스로를 위한 통역사 역할을 했다. 이중언어 아동 관련 전문가인 한 심리학자는, 사람들의 두뇌 용량이 대개 비슷하다고 말했다. 단일언어 사용자가 1만 단어를 알고 사용한다면, 이중언어 사용자는 각 언어당 5천 단어에 그친다는 것이다. 나는 평생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난제와 씨름한 결과, 영화의 영상 언어에 매료됐다. 영화 제작이란, 내 안에 있는 것을 바깥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환하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원본과 최대한 비슷하지만 결코 동일할 수 없는 대체품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그 심리학자는 이런 얘기도 해 줬다. 두 언어 사이를 넘나들 때 사용하는 뇌 영역은, 언어를 관장하는 부분이 아니라 사고의 유연성을 담당하는 부분이라고. 그 영역은 근육처럼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강화된다. 바로 그 유연성이 '기생충'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유연성은 이해와 공감의 토대가 된다. 공감은 영구적인 타자들간에 다리를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약간은 덜 외롭다고 느껴지는 것, 그게 내가 이야기꾼이 되고 싶은 이유다.
이제 나와 노트북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유일한 통역은, 나 자신과 영화 언어 사이의 통역이다.


이해와 공감, 그리고 이어지는 위로. 어쩌면 이 정도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이다. 실제로는 뼈가 시리게 외롭지만, 글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가끔씩 조금 덜 외로운 것 같다는 실감을 얻는 것. 그런 실감으로 고달픈 마음을 달래고, 여전히 외로운 인생을 버틸 힘을 얻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음악'이 아니라 내 기분에 맞는 '배경 음악'을 골라 듣고, 소설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키워드에 따라 선택하는 것일까? 딱 지금의 내 마음 같아서, 조금 덜 외롭게 만들어 주는 무언가를 보려고. 외로워서 쓰고, 외로워서 읽고. 다들 외롭고 딱한 처지이기는 매한가지네.


그렇다면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해져도 괜찮을 텐데.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실제로 발이 움직이는 방향은 따로 노는 게 또 인간이라 별 수 없다. 우리는 후회할 일을 하고 후회한다. 후회할 게 뻔하니까 저지르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되면 이미 신이고 부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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