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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Jun 12. 2024

[수업]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

남의 일기 읽기 2024.6.11

창문이 좋다.


어릴 때부터 집을 그리라고 하면 문만큼이나 큼직한 창문을 그렸다. 때로는 아예 문을 생략하고, 지붕 바로 아래서부터 땅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창문을 그리기도 했다. 이런 창문이면 문과 다를 바가 없는데, 왜 굳이 창문이어야 했을까. 문과 창문은 모두 바깥세상으로 이어지지만, 창문은 문과 달리 열기 전에도 밖을 내다볼 수가 있다. 진짜 세상을 맞닥뜨리기 전 살며시 엿볼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밖에서 뭐가 날 기다리고 있는지, 나가고 싶은 곳인지 아닌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다. 창문이란, 스치는 바람에도 토끼처럼 겁을 먹고 화들짝 놀라는 나를 위한 맞춤형 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언젠가의 국어 교과서에서 만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를 외우곤 한다.


- 창 내고자, 창 내고자,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 이따금 하 답답할 제면 여닫아볼까 하노라.


하루의 막바지에 눈을 감고, 내가 좋아하는 창문을 마음에 그린다. 유럽의 어느 응접실에 있을 것 같은 고풍스러운 모양새의 통창이어도 좋고, 손바닥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자그마한 창이어도 좋다. 이 창문을 열면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나는 지금 어떤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을까. 살면서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어 가슴을 떨리게 하는 새로운 공기? 아니면 내 존재의 핵심을 둘러싼 안개처럼 그간 몹시도 그리워했던 친숙한 공기? 창문을 활짝 연다.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풍경 안에 존재하려고. 바깥세상을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그 속으로 뛰어들기 위하여.


창문 너머 도달한 그곳은 어디일까. 하얀 모래가 길게 깔린 바닷가? 푸른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유람선 위? 고요한 호수? 깊은 숲? 내가 두 발을 디딘 곳은 작은 연못 근처였다. 아무도 몰래 숲이 품은 보석. 위로도, 구경꾼도 없이 혼자 울 수 있는 곳. 연못의 물은 맑고 깊고 차다. 미지근한 눈물이 떨어지자 수면 아래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난다. 보글보글 소리가 들린다. 뭔가 다가오고 있다. 혹은 만들어지고 있다. 몸을 바짝 낮춰 귀를 기울이는 순간, 물은 사라지고 나는 통나무집 옆에 서 있다. 생나무 냄새가 자욱하다. 거칠거칠한 나무껍질을 만진다. 벽을 더듬어 창문을 찾는다. 하지만 내부가 보이지 않는다. 안에서만 밖을 볼 수 있는 창문인가 보다. 이 안에 사람이 있다. 누군가 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 기척을 감지하는 동시에 문이 열린다.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린다.


- 들어와.


집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절로 발이 움직인다. 오븐에서 빵 굽는 냄새는 마치 천국의 향기 같다. 냄비에서는 버섯과 우유, 크림을 섞어 끓이는 진하고 고소한 냄새가 난다. 그리고 몇 가지 베리의 새콤달콤하고 풋풋한 향기. 더 바랄 게 없는 숲의 식탁. 이 정도였구나, 내가 원하는 전부가. 따듯한 집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식사를 한다. 한 술, 두 술, 점점 속까지 따듯해진다. 아무도 아무 말이 없다. 다시금 눈물이 차오른다.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순간. 내 방이다. 마음의 창을 통한 여행이 마무리됐다. 오늘밤은 곰인형 같은 위로를 품은 채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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