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는 시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읽고 쓰는 마음 Jun 05. 2024

[수업] 되살아나는 이야기, 동화    

동화 재해석 글쓰기 2024.5.18

#1 푸른 수염


남편이 나를 불렀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의 앞에 선 채로 애써 입꼬리를 올린다. 결혼한 지도 한 달쯤 지났지만 여전히 그가 어렵다. 찌를 듯이 날카로운 눈빛 아래 덥수룩한 푸른 수염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보면 볼수록 이질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소름이 오소소 돋고 만다. 그가 말했다.

“당분간 여행을 다녀오려 하니 이것을 맡아주시오.”

달걀 하나와 열쇠 다발이 내 손에 쥐어진다.

“소중한 물건이니 조심해서 다루시오.  그 열쇠로 이 성의 어디라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만, 지하 방만은 절대 열지 마시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힘주어 말한다.

“명심하시오. 지하만은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  푸른 수염 이야기를 통해 매혹적인 금기를 알게 됐다. 일단 금기가 설정되면 인간은 호기심이 발동하게 마련이고, 종국에는 금기를 깨게 된다는 것을. 이전 아내들은 달걀과 열쇠를 싸들고 다니다가 지하 방에 즐비한 여자들의 시체를 발견한 뒤, 소스라치게 놀라 달걀을 떨어트리고 만다. 달걀에 밴 핏물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그들이 금기를 깼다는 사실을 소리 높여 증언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푸른 수염이 새 아내를 죽여 지하에 던져 넣을 때까지.

하지만 푸른 수염에게 시집간 뒤 연락이 끊긴 언니 둘의 행방을 찾으러 온 막내는 조금 달랐다. 문제의 방은 당연히 열어 보지만, 지하로 내려가기 전 안전한 장소에 달걀을 잘 숨겨 놓는다. 그녀는 푸른 수염의 시험을 통과하고 신뢰를 얻어 이후 오빠들을 불러 살인마를 처단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여기에서 얻은 교훈은, 소중한 건 싸들고 다니지 말라는 거다. 인생에는 많은 고난이 있고, 어떤 고난은 좀처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없다. 우리 집 지하실 바닥에 피웅덩이가 고여 있고, 벽면에는 여자들의 시체가 고깃덩어리처럼 줄줄이 내걸린 사태를 누가 예측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최소한 예측할 수 있는 고난에 대해서는 화근의 싹을 잘라야 한다. 대비할 수 있는 건 미리 대비를 해야, 대비할 수 없는 것을 상대할 여력이 생긴다.

깨질 수 있는 달걀을 싸들고 돌아다니지 말고, 잃어버릴 수 있는 중요한 물건은 애초에 따로 잘 보관하자. 푸른 수염의 아내 덕분인지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지갑이나 차키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2 마리아의 아이


두 손을 뒤로 돌린 채 기둥에 묶였다. 발아래 쌓인 장작더미에 불이 붙는다. 시커먼 연기가 꾸역꾸역 올라온다. 머릿속에서 마리아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13번째 방에 들어갔니?”

"아니요, 전 절대 들어가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을까. 나는 내게 허락된 12개의 방 너머 13번째 방의 문을 열고,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찬란한 광휘가 내게 닿아 손가락 하나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이후로 줄곧 손가락을 감추며 거짓말을 했다. 천국에서 쫓겨나고, 목소리를 빼앗기고, 첫째 아이를 빼앗기고, 둘째마저 빼앗기고, 제 자식들을 잡아먹는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화형을 당하는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 죄를 부인했다.

마리아님은 끊임없이 내게 진실을 말할 기회를 주셨는데. 말하고 싶다. 이제라도 진실을 말하고 뉘우칠 수 있다면. 결심하는 순간, 속에서부터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와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밖으로 터져 나온다.

“마리아님, 제가 13번째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나를 삼키려는 화마를 제압하며 마리아님이 강림하셨다. 양팔에는 잃었던 내 두 아들을 안고.  


: 마리아의 아이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동화다. 어릴 때는 마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의 어머니라며 대체 왜 이렇게 지독한 건데.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 존재여야 하는 거 아냐? 애가 치기 어린 마음에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한 번 실수한 다음에는 괜한 고집과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부인할 수도 있지. 그걸 이 지경으로 혹독하게 벌을 준다고? 마지막까지 안 빌었으면 진짜 타 죽게 내버려 두려고 했나?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마리아를 이해하게 됐다. 소녀에게 열쇠를 맡기고 13번째 문은 열지 말라고 당부하는 순간부터 마리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금기는 반드시 깨지리라는 것을. 좋은 부모는 자식에게 불복종할 자유를 허용한다. 바른 길만 걷도록 강제하는 대신 저 나름의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며 성장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제공한다. 마리아는 소녀의 쭈뼛거리는 태도와 황금빛으로 물든 손가락을 보면서 문을 연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질문을 던져 진실을 말할 기회를 줬다. 그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문을 열었냐고 묻고, 거짓말을 할 때마다 소중한 것을 앗아갔다.

실수할 수 있어. 난 너를 몇 번이라도 용서하고 기회를 줄 거야.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마. 너를 믿는 나를 기만하지는 마. 네 안의 진실과 네 삶이 일치할 때 조화가 이루어지고 행복이 온단다. 네가 그걸 배울 때까지 난 계속 찾아올 거야.

마리아는 내 안의 어머니, 거대한 양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초자아였다.


#3 완두콩 공주


“안녕히 주무셨어요?”

왕비는 아침 상에 앉는 공주를 관찰한다. 비를 쫄딱 맞고 성문 앞에 서서, 하루만 묵어가게 해 달라고 청하던 어제와 마찬가지로 핏기 없는 얼굴. 하지만 눈 아래가 더 어두워진 것 같다. 왕비는 짐짓 모르는 척 묻는다.

“잠자리는 편안했나요?”

그러자 공주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진다.

“오, 요 아래 뭔가 딱딱하게 배기는 게 있어서 한숨도 못 잤어요. 아무리 뒤척여도 피할 수가 없어서, 등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 같아요!”

왕비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여자다. 두툼한 매트리스 20장. 그 위에 다시 폭신한 거위털이불 20장을 더 깔아도 맨 아래 놓인 완두콩 한 알을 느낄 수 있는 진짜 공주! 드디어 내 아들의 아내가 될 공주를 찾았다.


: 완두콩 공주는 상당히 가소로운 인물이다. 본인은 공주라고 주장하지만 남루한 옷차림에 변변히 묵을 곳조차 없어서 남의 성문을 두드리는 처지. 그런데도 살던 가닥이 있어서 완두콩 한 알의 존재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녀의 진정한 정체성은 화려한 보석과 드레스가 아닌 섬세한 감각과 당당한 태도에 있다.

얼마 전, 아이에게 새로운 미술 선생님을 찾아줬다. 이제까지는 집에서 혼자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렸지만, 미술 쪽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니 기술적인 부분에서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고, 아이도 동의했다. 처음 수업을 받은 날,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교실을 나섰다. 자기가 그린 사람 얼굴을 선생님이 인체 비례에 맞게 고쳐줬는데, 남이 손을 대는 순간 인물 특유의 성별을 알 수 없이 모호한 분위기와 가련한 사연이 싹 날아가버리고, 그냥 싸가지 없는 여자 1로 전락하더라는 것이다. 자기 세계가 파괴되는 충격과 모욕감을 받았다면서 부들거리는 아이를 보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너는 진짜 예술가구나. 완두콩 한 알도 못 참는 진짜 공주처럼 내가 만든 세계와 내 아티스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맹렬히 싸울 준비가 됐구나.

피할 수 없는 시험을 거친 완두콩 공주처럼 아이 역시도 시련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장 불편해도 꾹 참고,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자기 세계를 추구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목만 길쭉하게 뽑은 모딜리아니의 작품이나 피카소의 조각난 입체파 기법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들의 그림 실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도 남들처럼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지만, 그걸 뛰어넘어 나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었으니까.

그 경지에 닿기 위해 기본을 배우고 있는 어린 예술가를 응원하며 오늘도 미술 학원으로 차를 달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업] 세계의 수호자는 삼각지대를 육성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