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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시간

[모임] 생각과 다른 많은 일들

진실과 편견 2025.3.8

by 읽고 쓰는 마음

우리는 모두 수많은 편견을 갖고 살아간다. 삶의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편견은 더 공고해진다. 갑옷처럼 혹은 성채처럼. 하지만 애초에 갑옷이나 성채가 왜 존재하는가? 그 안에 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맹수의 이빨, 적들의 창과 화살, 혹독한 외부의 시련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편견도 마찬가지로 진실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는 비늘이 아니라 생존의 지혜일 수 있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혹은 잘 먹고 살 사는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교훈을 한데 뭉뚱그리면 편견이라는 매뉴얼이 나온다. 물론 편견이 항상 맞는 건 아니다. 그랬으면 편견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라고 불렸을 테니까.


우리 집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첫째 달고나는 활발하고 사교적이다. 매일 뽈뽈거리면서 부지런히 다니고, 자기 영역을 시찰하고 관리하고, 평소 안 열리던 문이 열리면 잽싸게 튀어 들어가서 영역을 확장하려 하고, 열리던 문이 안 열리면 다시 열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반면 둘째 흑당이는 매사 조심스럽다. 초인종이 울리면 잠깐 움찔했다가 누가 왔는지 점검하러 내려와 보는 고나와 달리, 곧장 이층으로 달려가 안방 침대 아래 깊숙이 몸을 숨긴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오는 친구네도 흑당이를 제대로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는 이게 개묘차, 각 고양이들의 성격 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 들은 이야기로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됐다. 그 집에도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고, 애들 행동 양식이 꼭 우리 집 같았다는 거다. 그러다 첫째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 어린 고양이를 데려와 서열이 바뀌었다. 과거 둘째는 첫째가 되고, 새 고양이가 둘째가 되고. 그러자 손님이 올 때마다 숨기 바빴던 둘째가 별안간 내다보는 고양이로 변했다. 실은 과거의 첫째도 '어? 손님 왔다, 반가워 냥냥'이라며 왔던 게 아니라 내 영역의 침입자가 왔다는 걸 알고, 일인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는 평소 첫째에게 밥을 좀 뺏기고, 큰일을 본 다음에는 꼼꼼하게 모래로 덮는 수고를 하는 대신 비상시에는 첫째에게 영역 보호를 맡기고 내 살 길만 찾아 내뺄 수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고양이도 만든다.


돌아보면 흑당이도 마찬가지로 편견을 깨면서 정착했다. 흑당이는 보호소를 거쳐 포스터인 우리 집에 맡겨졌다. 포스터란 길에서 구조한 아이들을 임시 보호하다가 좋은 입양처가 나타나면 보내주는 역할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계속 새로운 고양이들을 임시 보호할 계획이었다. 포스터가 필요한 고양이 세 마리가 있는 펫샵으로 애들을 보러 가기 전, 사진을 보면서 나는 디셈버를, 딸은 어거스트를 점찍었다. 그런데 막상 철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적극적인 애정 공세로 우리 맘을 뺏은 건 당시 노벰버였던 흑당이다. 가장 열심히 야옹대고 활개를 치면서 우리 손에 머리를 부비고 난리도 아니었다. 결국 우린 노벰버를 임보하기로 결정하고 집에 데려왔다. 그 후로 며칠간 흑당이를 보면서 타고난 개냥이란 이런 애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해 손만 닿아도 골골송을 부르고, 발톱 깎는 걸 싫어해도 우리를 할퀴거나 무는 건 생각조차 못 하는 착한 아이. 흑당이는 심지어 매일 아침마다 날 깨우러 와서 옆에 누워 애교를 피우며 기상 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웠다. 결국 우리는 가족이 됐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같이 살면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흑당이가 개냥이가 아니었다는 거다. 이 집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을 뿐 사실은 안기는 걸 싫어하고, 사람들이 다가올 때마다 펄쩍 뛰다시피 경계하는 애였다. 그냥 옆에 지나가던 길이었던 내가 머쓱해질 만큼.


살다 보면 생각과는 다른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편견은 편견대로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얘는 틀림없이 개냥이라는 편견이 우리에게 둘째 고양이를 선사했다. 진실은 진실대로 신선하다. 편견이 깨지면서 그 사이로 푸른 하늘이 올려다보이고, 한 줄기 빛이 흘러든다. 그럼 내 세상이 약간 넓어진 듯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그건 익숙한 편견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의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씁쓸한 통쾌함보다 조금 더 고차원적인 즐거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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