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영향을 미친 모든 것 2025.2.15
"혹시 오늘 생일이세요?"
식사가 끝날 무렵 서버가 와서 물었다. 리뷰 이벤트로 공짜 디저트를 먹을 생각에 들떴다가, 이벤트가 종료됐다고 해서 약간 샐쭉해진 참이었다. 그제야 식사 예약을 하면서 생일이라고 노트를 남겼던 기억이 났다. 생일이면 뭐? 디저트라도 주려는 건가? 나는 덥석 미끼를 물었다.
"어, 생일이면 뭐 주시는 게 있나요?"
"네, 근데 뭘 드리는지는 비밀이에요."
참 더럽게 까다롭네. 그냥 시원하게 말해주면 되지. 아무튼 나는 그 미지의 무언가에 욕심이 났다. 기대했다가 충족되지 않은 디저트의 보상을 받고 싶었다. 생일이 맞다고 하자 서버는 오늘이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어제였지만, 오늘이라고 해야 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빈정이 상하는 한편으로 불안해졌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주려고 사실 확인을 이렇게 철저하게 한담. 니들이 관공서야 뭐야. 늘 운전면허를 가지고 다니지만, 신분증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서버는 생일이 며칠이냐고 물었다. 나는 2월 7일이라고 답했고, 보다 못한 딸이 나섰다.
"엄마 생일은 6일이잖아. 어제가 생일이었는데 오늘 축하하러 온 거예요."
빰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없다고 말한 면허 대신 헬스카드를 내밀어 내 생일이 어제였다는 것을 확인해 줬다. 사실 나는 신분증이 2개나 있었다. 그들이 초를 꽂아서 가져온 싸구려 버터크림 케이크에 포크질을 하면서, 그 지독한 단맛에 반비례하듯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까짓 게 뭐라고 거짓말을 한 나 자신이 환멸 나서. 가게를 나와 딸에게 털어놓았다. 난 기만을 참을 수 없고 거짓말하는 인간들을 경멸하는데, 내가 바로 그런 인간이라는 게 못 견디게 부끄럽고 싫다고. 너처럼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왜 난 굳이 거짓말을 했을까.
"엄마는 그냥 헷갈렸던 거 아냐?"
"아니, 정확히 알고 거짓말을 한 거야. 그 사람들이 뭘 주는지 몰라도 그걸 받고 싶었거든."
간신히 진실을 말할 용기를 낸 나에게 딸은 너그러이 말했다.
"괜찮아.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오늘 교훈을 얻었잖아. 거짓말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다는 걸. 그럼 앞으로 안 하면 되지."
그건 약간 과장을 보태서,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거짓말과 관련해 교훈을 얻을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이민을 확정하기 전 캐나다에서 반년 간 살아보려고 왔던 2015년의 일이다. 남편은 어학연수 비자를 받아 먼저 들어갔고, 나는 5살짜리 딸과 둘이 방문 비자로 입국하려 했다. 남편의 비자 발급을 도와준 어학원은 이렇게 조언했다. 캐나다에 친척이 있어서 방문하는 걸로 하라고. 잠깐 놀러 왔다고 하면 괜찮을 거라고. 온 가족이 다 같이 6개월간 살아보려고 왔다는 진실을 말하면, 그들은 불법체류를 의심해서 우릴 돌려보낼 수도 있다고.
코치받은 대로 입국심사관에게 거짓말을 했고, 우리는 외딴 방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는 퀭한 눈의 사람들이 벤치에 널브러져 시간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어떤 거짓말도 늘어놓을 수 없게 일단 몇 시간이고 그대로 방치하는 거다. 간신히 내 차례가 돼서 시시콜콜한 질문을 받으며 횡설수설하던 끝에, 그들은 통역을 시켜 한국에 있는 엄마한테까지 전화를 걸었다. 당신 딸이 이런 얘기를 하는데 사실이냐고. 친척 시나리오를 몰랐던 엄마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해줬고, 나는 결국 심사관에게 전부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실은 이런 조언을 들어서 그렇게 말했다, 가족이 다 같이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우리는 한국에 직장도 있고, 휴직 상태라 다시 돌아갈 계획이다, 여기 눌러앉을 생각은 없다고.
마지막 순간, 그가 나를 똑바로 보던 시선은 잊을 수가 없다. 경멸이나 비난은 아니었지만 폐부를 뚫는 듯이 날카로웠다. 왜 거짓말을 했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여기서 대체 몇 시간을 허비한 거야. 저기 지쳐서 잠든 네 어린 딸을 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앞으로는 절대 거짓말 하지 마. 한 손에는 캐리어를, 한 손으로는 반쯤 졸고 있는 애를 끌고, 연결 편을 타려고 내달리면서 느낀 것은 안도감보다 수치심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쉽고 빠르게 가려다가 오히려 진창에 빠지는구나. 하지만 그 혹독했던 경험도 내 부도덕성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나를 비난하는 대신 사랑으로 감싸주는 딸을 보면서 문득 장발장이 떠올랐다. 배곯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치려다가 7년의 징역을 살고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는 꼬리가 붙은 사람. 세상으로부터 비난만 받을 때, 그런 놈이라고 욕을 먹을 때, 그는 정말 그런 놈이 될 작정이었다. 온 마을이 문을 걸어 잠그는 와중에 식사와 잠자리를 내어준 미리엘 주교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쳤다. 혹시 주교가 깨어나면 촛대로 내리쳐 죽일 각오까지 한 채로. 그런데 장발장을 잡아끌고 온 경찰에게 주교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선물로 준 거라고, 은촛대도 가져가라고 했는데 그건 왜 빼놓고 갔냐고. 그의 본성이 선하고,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한없이 믿어주는 사람을 만난 이후로 장발장은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다. 자베르가 아무리 너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비난하고 괴롭혀도, 복수하는 대신 그의 목숨을 구했다. 만약 장발장이 그를 죽이려 했다면 자베르는 웃으며 죽었을 것이다. 역시 난 틀리지 않았고, 넌 쓰레기라고 확신하면서. 하지만 장발장은 그를 살림으로써 자신의 숙적을 영영 사라지게 만들었다.
거짓말로 혼쭐이 나고 10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나는 정직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매와 손가락질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 두려워서.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