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팔 편지지에 코롱 향수 좀 뿌려본 사람?

잡지 뒷면에서 시작된 내 SNS의 원형

by 라이팅유주

그때 그 시절, 펜팔 문화를 기억하는가?


라떼는 하이틴 잡지나 만화, 가요 월간지 뒷면에 펜팔 친구를 찾는 페이지가 따로 있었다. 이름, 주소, 나이, 취미,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가 실려있던 펜팔 페이지.


지금 같으면 개인 정보 유출이라며 기겁할 일이지만, 당시 깨알같이 박혀있던 낯선 이름들은 지금으로 치면 SNS의 추천 피드와도 유사한 것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학교 친구들과 교환일기를 주고 받으며 낄낄대던 한 명의 중학생이었다. 하지만 교환일기는 어디까지나 이미 알고 있는 우리끼리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던가.


얼굴도,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가 먼저 편지를 보낸다는 그 생경한 경험. 그것은 이제껏 써왔던 교환일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이었다.


잡지에 내 개인정보를 올릴 용기가 없던 나는, 펜팔란에서 유심히 한 명을 고르고 골라 그녀에게 내 마음을 먼저 전해 보기로 했다. 단지 중학생 소녀였던 나에게 그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자 짜릿한 모험이었다.


다부진 결심을 하자마자, 당장 동네 문구점으로 달려갔다. 어떤 편지지를 고르는 게 좋을까. 편지지의 디자인도 허투루 고를 일이 아니었다. 마치 소개팅 자리에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고민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고민이랄까.


그렇게 유심히 고른 편지지. 고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첫 문장을 떼는 건 또 왜 그리 어렵던지.

"안녕, 나는 부산에 사는 중3, OO이야. 난 비오는 날을 좋아하고..."


으악. 쓰다 보니 너무 낯간지럽다. 그래서 다시 새 편지지로 교체.


그렇게 몇 줄을 더 써내려 가는데 이번엔 글씨가 삐뚠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또 편지지 교체.


당시의 나는 오직 편지 한 장에 내 모든 정체성을 담아야 했기에 한 줄 한 줄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은 향기로 기억된다던데. 좋은 첫인상을 남기고 싶어 편지지에 코롱 향수까지 뿌렸다. 편지가 도착하기까지는 그래도 며칠 걸릴테니까 그동안 향기도 옅어질테고. 생각보다 더 진하게 뿌려야겠군. 그래 좀 더 뿌려보자 칙칙 치지칙.


평소보다 300%는 잘 나온 내 사진을 동봉하고, 정성껏 코팅한 네잎클로버까지 넣고 나니 비로소 준비 끝. 설레는 마음으로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더니 편지가 아래로 떨어지며 툭-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내 인생 누군가와의 첫 번째 연결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지독한 기다림. 요즘은 카톡이나 DM을 보내고 상대방이 확인하면 읽음 표시가 바로 뜨지만, 펜팔의 세계에선 그런 건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 우편함을 열어보는 게 나의 최우선 루틴이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펜팔 친구를 향한 나의 상상은 더욱 커지기만 하고.


그러던 며칠 뒤, 낯선 필체로 내 이름이 적힌 봉투가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 그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이라니!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좋아요 1,000개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진한 도파민이었다.


드디어 도착한 그 아이로부터의 답장. 그녀는 안산에 사는 나와 동갑내기 소녀였다. 당시의 나는 안산이 대한민국 어디쯤에 붙어있는지도 몰랐지만, 부산과는 꽤 먼 거리에 있는 지역인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봉투가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뜯고 싶은데 어서 편지 내용을 읽고 싶어 부산하기만 했던 내 손가락.


그렇게 서둘러 뜯어본 편지 봉투 안에는 내가 모르는 동네의 이야기, 그 애가 좋아하는 가수,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듯한 고민들이 가득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인데 편지지 위로 그 아이의 온기가 느껴지는 느낌이랄까. 그 묘한 연결감에 취해 나는 그날밤 바로 또 답장을 썼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던 우리. 서로 먼 거리에 살기도 했고, 나 역시도 안산에 갈 일이라곤 전혀 없었기에 우린 사진으로 서로의 생김새를 대충 짐작할 뿐.


하지만 그때의 추억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나의 내면을 꺼내 보인다는 점에서 30년 전의 펜팔이나 지금의 SNS나 결국 본질은 같은 것.


잡지 뒷면의 서너 줄 자기소개는 지금의 SNS 프로필이고, 예쁜 편지지를 고르고 스티커를 붙이며 향수를 뿌리던 정성은 피드를 가꾸는 자기표현의 본능과도 닮았다.


플랫폼은 디지털로 변했고 속도는 빛처럼 빨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 살고 있을, 나와 결이 맞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글을 쓰고 온라인 망망대해를 헤맨다. 결국 소통이란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 그 한 명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SNS에 미쳐(?) 있는 건 사실 그때 이미 시작된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고, 나를 소개하고, 답장을 기다리고, 다시 편지를 쓰는 그 지난한 과정들. 플랫폼은 바뀌었지만, 그 방식은 너무도 닮아 있어 놀랍다.


나의 펜팔 유람기는 여기서 끝이었을까?

아니. 그 시절의 나는 드디어 이성과의 펜팔에도 발을 들이게 되는데.


그 손발 오그라들면서도 설레는 이야기는 다음 화에 계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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