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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Sep 26. 2020

[체코 이야기]#2 아무것도 아닌 도시,브르노에 대하여

체코에 온다면 브르노에 들러주세요.


브르노를 아시나요?


 8년 전의 나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이 가져다주는 예측 불가능한 하루하루에 기꺼이 나 자신을 맡겨버린 배낭여행자였다. 다음 날은 어디로 갈지, 얼마나 머무를지 계획조차 없이, 발길이 이끄는 대로 여행했다. 계획 없는 일정 속에 마주치는 작은 골목들과 그곳에서 마주치는 인연들이 좋았다.


 그렇게 당도한 체코에서 브르노는 나의 첫 도시였다. 친한 친구가 브르노에 살아서라는 이유가 전부였다. 그로부터 4년 후 나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체코에 정착했고 다시 브르노에 짐을 풀었다. 빠듯한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한 내가 프라하의 비싼 월세에 거주지를 고민할 때 선뜻 방 하나를 내어준 친구의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어가 있을 때마다 250km 거리의 두 도시를 오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나의 체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브르노는 그렇게 나의 홈그라운드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프라하보다 브르노를 먼저 알았고, 프라하보다 브르노의 맛집을 더 많이 꿰게 되었으며, 프라하보다 브르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브르노에 대한 애정은 종종 숨길 수 없이 튀어나오곤 한다.


"브르노? 그게 어디야?"

"브르노? 거기 아무것도 없잖아."

"브르노? 얘기할 거리도 없지."


 종종 프라하 친구들 앞에서 브르노에 대한 애정을 나도 모르게 꺼내 보일 때면 그들은 체코 특유의 냉소적인 농담 방식과 '수도 것들의 자부심'따위가 뭉쳐진 답변으로 응수한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나의 브르노 순정이 굉장히 진지함을 눈치챈 순간부터는 날 약 올리려 브르노 깎아내리기에 더 열을 올리는 식이다. 제2의 도시 브르노를 비웃는 프라작(프라하 사람)들 앞에서,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 출신의 나는 괜스레 더 발끈한다. "야! 수도 깍쟁이들보다는 훨씬 낫거든?"

양배추 광장에서 보이는 구시청사 탑.

브르노가 왜 그렇게 좋은데?


 프라쟉들의 그 반응이 사실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인구는 천만명을 조금 웃도는 작고 평화로운 나라 체코의 제2의 도시 브르노의 인구는 겨우 37만 명. 130만 명이 사는 수도 프라하에 비하면(물론 나라 전체 인구의 몇 배에 달하는 관광객으로 인해 프라하의 체감 인구 밀집도는 훨씬 높다.) 너무 초라해 보이긴 한다. 게다가 프라하처럼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선을 사로잡는 랜드마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아마 많은 한국인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일분일초를 쪼개어 바쁘게 돌아다니는 여행자라면 브르노에 도착한 지 반나절도 채 못되어 도시를 떠날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온다면 이 도시가 그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켜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대체 브르노가 왜 그렇게 좋냐는 질문을 현지 친구들에게도 종종 듣는다. 프라하를 동경하며 프라하로의 이직을 꿈꾸는 브르노에 사는 외국인 친구들도 내게 같은 질문을 물어온다. 이쯤 되면 으레 나올만한 답변이 있을 만도 한데 나는 매번 이 질문에 쉬이 답을 내놓지 못하고 스스로 되묻는다. 그러게, 뭐가 그리 좋은 거니? 매번 대답을 망설이는 까닭은 나 또한 정확하게 콕 집을만한 이유를 알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한 가지만 댈 수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이 나의 집이라는 거다. 다른 기후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가진 낯선 곳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주는 그 안락함만으로도 '내 집이 자리한 장소'는 애정을 줄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굉장히 주관적이지만 부정할 도리가 없는 내 브르노 사랑의 근거다.




작지만 따뜻하고 맛집이 가득한 도시


 각종 미디어에서 브르노를 소개할 때면 빠지지 않는 매력을 봐야겠다. 체코 제2의 대학교인 마사릭 대학교로 인해 젊은 인구가 많아 힙스터 시티로 불리며 학생들의 도시에 걸맞게 착한 물가와 숨은 맛집 그리고 미소에 인색하지 않은 도시다. 실제로 내가 처음 브르노에 왔던 8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정도로 힙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미소가 인색하지 않은 도시. 지난 글에서 털어놓았듯 쌩하기 그지없는 외부인들에 대한 체코인들의 쌀쌀함을 1에서 100까지 넓게 펼쳐 봤을 때 브르노 사람들의 쌀쌀맞음 지수는 약 30도쯤 될 것 같다. 물론 어디든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 소위 케바케(Case by Case:경우에 따라 다름을 뜻함)의 법칙을 피해 갈 순 없겠지만 지난 4년간의 나의 경험상 브르노에서는 길 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작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목격하거나 카페나 식당에서 미소를 띤 직원들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언어를 몰라서, 문화를 몰라서 허둥대던 서러운 외국인이었던 내게 그들의 너그러움은 어마어마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아, 참고로 프라하의 쌀쌀맞음 지수는 90-100이다. 물론 브르노를 비웃었다고 이 글을 빌려 복수하는 건 절대 아니다.


비오면 생각나는 베트남 쌀국수
사이드 디쉬로 롤은 필수다. 국물 요리를 메인 메뉴로생각하지 않는 유럽 친구들은 보통 분보남보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맛집 이야기. 37만 명이 사는 작은 도시 브르노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장소들이 많다. 나 말곤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싶은 아지트 삼은 곳들이 한가득이다. 비 오는 날 막걸리와 파전이 생각나듯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지트들. 프라하보다 훨씬 저렴하고 프라하보다 훨씬 맛있으면서 프라하보다 훨씬 친절하기까지 한(브르노 만세!) 맛집들.


 현지보다 맛있을 것 같은 베트남 쌀국수 가게와 인도 여행 중 델리에서 매일 가던 단골집과 똑같은 맛을 내는 커리집. 서서 맥주를 마셔야 하는데도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선맥'을 자처하는 의자 없는 이상한 펍, 영업 시작 세 시간이 채 안되어 전량 매진으로 문을 닫아버리는 쿨한 버거집까지.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면 또다시 행복한 고민이 시작된다. 디저트는 어디서 먹지?


체코에서 제일 맛있는 크로와상을 사서 공원에 갈지, 프랑스 라OO와 피OOOOO보다 맛있는 마카롱과 당근케이크가 있는 카페로 갈지, 인생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로 갈지 그것도 아니면 8백 원이란 가격이 믿기지 않는 마들렌을 파는 가게에 가야 할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논의 끝에 우리는 외친다. "그래! 오늘은 마카롱에 당근케이크다!"


단 디저트에 화이트 와인이 엄청 궁합이 잘 맞다는 걸 아시는지. 제발 누구라도 시도해주세요!
예술 작품에 가까운 디저트들이 한 조각에 4000원 남짓.  마들렌은 700원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브르노에 들러줬으면 좋겠다. 작은 골목을 걷다가 발견한 카페를 아지트 삼아보고, 믿기지 않는 저렴한 가격에 감동해보고, 맥주 한 잔을 식사와 곁들이며 관광객이 아닌 진짜 체코 사람들로 활기를 띄는 광장을 바라봐주면 좋겠다. 나만 알았으면 좋겠는데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이 매력을 알아주면 좋겠다니, 난 어쩔 수 없는 투어 가이드가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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