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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Mar 06. 2022

영화 노트북의 현실판 주인공을 만났다.

[그 해 가을, 스위스]



르네 할머니께.  


르네, 잘 지내셨어요? 우선 늦어진 연락에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어요.

아무리 바빠서 마음만 있으면 금방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지난겨울엔 제가 좀 게을렀어요.

그렇다고 안부 인사 몇 자와 사진만 달랑 보내기는 싫어 하루하루 미루던 게 이렇게 늦어져버렸네요.


두 분과 만났던 날은 짧은 스위스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죠. 아름다운 자연, 상냥한 사람들, 예쁜 도시들까지. 스위스에서 좋았던 것들이 참 많았는데 반년쯤 지난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공항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두 분과의 만남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네요. 배가 고팠던 제가 가방에서 토마토를 꺼내지 않았다면, 동생이 베어 문 그 토마토의 과즙이 사방으로 터지지 않았었다면 우리는 통로 옆 좌석에 앉았던 두 분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채 스위스를 떠났겠죠?


토마토 과즙이 온 얼굴에 묻은 동생이 얼음이 되어선 동그란 눈으로 저를 한 번 그리고 옆에 있던 두 분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했어요. 곧 따가운 눈총이 쏟아질 거란 예상에 바짝 긴장했는데, 두 분이 울랄라 하시며 두 손을 올리면서 웃었죠. 두 분의 쾌활한 웃음에 마치 얼음 땡 게임처럼, 동생도 저도 함께 웃기 시작했어요. 제가 토마토가 든 봉투를 두 분에게 건네자, 르네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두 개를 집어 들고선 메르시, 하며 미소로 화답했지요.


차창 밖으로 그림 같은 풍경들이 자꾸만 나타나는데도, 제 눈은 자꾸만 두 분에게로 향했어요. 엉덩이가 들썩들썩, 괜스레 말을 걸고 싶었죠.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가만히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발을 통통 치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르네와, 그런 르네를 보며 그저 다정하게 웃기만 하는 코제트 선한 얼굴 때문이었을 거예요.


내려야 할 곳은 가까워만 오는데, 왠지 두 분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눈만 마주치면 누구에게나 말을 걸곤 하던 여행자였던 제 모습은 마음속 깊은 곳 어디론가 숨어버린 건지,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목소리가 도통 나오질 않았죠.


그러다 르네와 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저는 그 기회를 덥석 잡았어요. 두 분을 보면서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떠오르던 그 질문을, 그 사적인 질문을 해버린 거예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저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르네의 두 눈이 마치 다섯 살 개구쟁이의 눈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때 알았죠. 온 우주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우리 두 자매를 바로 이 날, 이 시각, 이 기차의 이 좌석에 앉혀두었다는 것을요. 눈 깜짝할 새 당신이 제 옆자리에 앉아있었어요. 그런 당신을 보며 코제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그 와중에도 당신을 향한 사랑이 그의 입꼬리에 걸어둔 미소는 숨기지 못한 채로요.


우리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니, 당신은 서툰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우리는 열일곱 살에 처음 만났어. 우리는 서로를 정말로 사랑했어, 정말로. 하지만 여느 젊은 연인들처럼 어느 날 이별했지."

"그리고 40년이 지났어. 하루는 누가 초인종을 누르기에 문을 열었어. 그런데 코제트가 문 앞에 서있는 거야. 너무 놀라 우두커니 문을 잡고 서있는 내게 이 남자는 그냥 이렇게 말했어 "안녕, 나야.""


"그렇게 그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린 이후 다시 우리는 십 대로 돌아간 것처럼 사랑에 빠졌어. 그리고 다시 삼십 년이 흘렀어. 그가 이제 여든, 나는 일흔일곱이야. 아 세월이 어쩜 이리도 빠른지!"


르네가 세월이 야속하다며 고개를 저을 때 두 사람의 눈이 만나자, 두 분은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죠.


40년 만의 재회라뇨. 스무 살에 보았던 노트북이라는 영화가 생각났어요.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일들이 존재한다니. 그리고 그 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내가 직접 만나게 되다니, 믿기지가 않았죠. 눈앞에 두 분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너무도 진실한 사랑과 애정이 묻어있어서, 그야말로 두 분이 서로를 위한 완벽한 상대라는 걸 방금 처음 만난 우리도 느낄 수 있었어요.


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제가 애타게 찾고 있던 순간이었거든요. 인연이나 운명이란 게 책에서나 나오는 단어가 아니라 실존한다는 걸 증명해줄 순간 말이에요. 사실 르네를 만났던 그쯤 저는 아주 오랜만에 시작한 연애가 삐걱대던 상황에 있었어요. 조심스럽게 시작한 연애인데, 저는 가슴을 활짝 열어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제 감정도 자꾸만 미적지근한 그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어요.


제가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그와 내가 인연이 아니었을까요? 같은 질문을 던지고 또 던져도 도무지 답을 알 수가 없었어요. 그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사랑을 믿고 싶은 제가 제 안에서 점점 사라지는 느낌만 들었죠. 내가 이제껏 알고 또 믿어왔던 사랑은 사실 인생의 어느 한 나이대에서만 유한한 무엇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삶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넘쳤던, 누군가를 있는 힘껏 사랑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었던 이십 대 초반에만 가능했던 거라면요? 이런 생각만 해도 심장이 아득한 골짜기 어디론가 떨어지는 기분이었어요.


두 분의 사랑 이야기에 너무 설레서였는지 자꾸만 손가락이 오타를 냈어요. 겨우 쓴 문장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르네에게 보여주었죠. "저도 코제트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그러자 르네는 검지를 얼굴까지 들어선 혀를 차며 노!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두 분 같은 사랑을 제가 꿈꾸면 안 된다는 뜻일까요? 르네는 우리에게 코제트를 가리키며 말했죠. "코제트, 단 한 사람. 그리고 르네 꺼."


이번엔 우리가 양손을 들고 울랄라! 하며 웃을 차례였어요. 번역 앱이 잘못했네요! 코제트를 넘볼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요! 네버!


르네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선 여전히 미심쩍단 눈빛을 우리에게 보냈어요. 그는 내 남자야. 꿈도 꾸지 마. 코제트는 르네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어요. 거 사람 참 짓궂기는, 이라는 표정으로 말이에요.


기차가 곧 베른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어요. 우리는 베른에 내려 짐을 챙겨 공항에 가야 했고, 두 분은 베른에서 기차를 갈아탈 예정이라고 했죠. 기차가 정차했고, 우리는 함께 대합실로 가서 연락처를 주고받았어요. 노트 위에 르네가 써준 이메일 주소는 무려 '르네트'! 두 분의 이름이 다정하게 겹쳐진 이메일 주소를 보면서 또 우리는 너무 달달하다며 호들갑을 떨었죠.     


만나서 너무 반가웠노라고, 꼭 다시 만날 날이 있으면 좋겠다고. 포옹을 하며 함께 찍은 사진을 꼭 보내겠노라고 약속했지요. 두 분이 연결 편 기차를 타기 위해 다시 승강장으로 떠날 때, 르네가 뒤를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고 있던 우리에게 말했어요. 코제트는 내 남자!


깔깔 웃으며 잘 알겠다고 머리 위로 우리는 원을 그렸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두 분의 뒷모습이 멀어져 가는 걸 보며 생각했어요. 누군가와 함께 하게 된다면, 꼭 두 분처럼 노년에 나란히 손잡고 걸어갈 수 있는 관계를 빚어가야겠다고요.

물론 두 분이 다시 만나기 전까지 각자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했었는지 혹은 서로를 잊지 못했던 건지 그 자세한 이야기를 저는 몰라요. 언젠가 르네에게 그 이야기를 듣는 날이 올 수도, 아니면 지금 알고 있는 두 분의 이야기를 전부로 알고 평생 살아갈 수도 있겠죠.


괜찮아요. 제가 아는 딱 그만큼의 이야기만으로도 두 분의 사랑 이야기는 제게 위로이자 응원이자 희망이 되었으니까요. 두 분은 장담컨대 저의 지난 스위스 여행의 진짜 이유였던 것 같아요. 함께 부치는 사진도 맘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차가운 흙을 떨쳐내고 피어난 봄꽃들을 보았어요. 그 꽃들이 겨우내 미루어왔던 르네에게 보낼 편지를 쓰게 만들었어요. 르네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떠올리는 것만큼 이 봄을 맞이하기에 완벽한 준비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랑을 느껴야 마땅한 봄이니까요. 모두가 사랑에 설레어도 마땅한 계절이니까요.


저의 모든 진심을 담아, 두 분의 매일이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바라요. 아무쪼록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길. 이만 줄일게요.


애정을 담아, 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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