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올해도 오고 말았습니다. 프라하에도 가을이 찾아오고 말았네요. 제가 어느 날 불현듯 적도와 가까운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는 이상, 삶이 계속되는 한 가을은 매년 저를 쫓아다니겠지요.
8월의 끝자락에 튀르키예로 달려가 겨우 여름을 붙들고서는 바짓가랑이까지 붙잡고 늘어지다가 울며 겨자 먹기로 체코에 돌아왔더니 글쎄 100년 만의 홍수가 찾아온 게 아니겠어요. 덕분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가을과 재회를 하게 되었죠.
휴가 마지막 날. 아니 고작 두 시간 날아왔을 뿐인데 25도 차이라니. 거 정말 너무하지 않나요!?
그래도 맑은 가을날의 프라하는 블타바 강 위에 내려앉는 햇살처럼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합니다. 뜨겁던 여름의 햇살은 선선한 가을바람을 한 겹 덧입고선 너그럽게 피부 위에 내려앉고, 가을 햇살과 바람 아래선 불필요한 생각들도 바스락 거리는 낙엽처럼 한결 가벼워져 마음 한편으로 밀어내기가 수월해지죠.땀을 뻘뻘 흘리고선 시원한 물 한잔 들이켜는 여름밤 러닝의 즐거움조차도 속을 뻥 뚫리게 하는 시원한 온도와 바람이 함께하는 가을 저녁 달리기가 주는 쾌감에는 비할바가 못되고요.
비록 애증이 뒤섞인 계절이지만 제 마음이 무결한 반가움으로 가을을 반기는 순간이 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여름의 막바지랍니다. 동네 와인 가게에서 '이 녀석'이 왔다는 걸 알리는 입간판을 보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가을의 존재를 인정하고야 말아요. 소개할게요.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음료. 부르착입니다.
부르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명쾌한 답을 내기가 어려워요. 그 정체성이 너무나 변화무쌍하거든요. 가을의 초입의 저와 늦가을의 제게 부르착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아마 각각의 시간의 저는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겁니다.
'신선하게 착즙 한 포도즙을 발효한 것.'위키피디아에서는 부르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와인을 빚기 위해 짜낸 포도즙이 갓 발효하기 시작했을 때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정제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의 포도즙이기에 투명한 와인과는 다르게 탁한 색이에요. 붉은 부르착이 일반적으로 당도가 좀 더 높고,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만들어진 부르착은 단맛과 산미 그리고 적당한 탄산감이 밸런스를 이루고 있죠
적어도 제게 부르착은 가을 그 자체입니다. 가을이 시작될 때 나타나서는 가을이 끝날 때 함께 사라져 버리죠. 제철 과일들과는 좀 달라요. 일 년 중 한 철만 맛볼 수 있다는 점은 같을지 몰라도 과일이 제철 내내 별반 다르지 않은 맛을 선사한다면 부르착은 계절과 함께 깊어가거든요.
갓 나올 땐 포도 주스에 가까웠던 녀석이 야금야금 알코올 도수를 높여가며 가을의 끝자락엔 그야말로 '성숙미'를 폴폴 풍기는 와인에 가까워지고 11월 성 마틴의 날이 되면 당당하게 올해의 첫 와인이란 타이틀을 달고서 식탁 위에 오르게 되죠. 이렇게 쓰고 보니 포도주스로 시작한 와인 꿈나무의 성장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성장 드라마 같기도 하네요.
채 여름 기운이 가시지 않았을 때,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을 거치며 부르착의 존재가 슬며시 잊혀 갈 딱 그 시점에 부르착은 귀환을 알립니다. 부르착을 판매하는 입간판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벌써? 벌써 부르착이 나올 때가 됐다고?'를 외치죠. 재밌는 건 사람들의 그 반응이 매년 반복된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의 성인이라면 11월마다 '벌써' 수능이 코 앞이란 뉴스에 매년 놀라는 것과 같달까요. 체코에 살게 된 이후 저는 부르착이 나올 때마다 인간이 얼마나 망각의 동물인지 절실히 깨닫고는 한답니다.
이 무렵 체코에서 부르착은 곳곳에서 목격됩니다. 주말 아침에 열리는 파머스 마켓에 모인 사람들은 한 손엔 신선한 야채로 가득한 장바구니를 들고 또 한 손엔 부르착이 담긴 잔을 들고선 수다를 떨고, 동네 와인 가게에 앉은 사람들의 손에도 부르착이 담긴 와인잔이 들려있어요. 트램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페트병에 담긴 부르착을 들고서 귀가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산뜻한 탄산감이 기분 좋게 혀를 간지럽히는 부르착으로 가을을 맞이하고 나면 체코의 가을은 부르착과 함께 깊어만 갑니다. 저도 가을엔 되도록 부지런히 부르착을 마시려 하는데 발효를 멈추지 않는 부르착은 그 맛이 매일마다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숙성이 꽤나 진행돼 한 잔을 마셔도 살짝 알딸딸한 기분을 느낄 때면 다시금 우리가 가을의 어디쯤 서있는지를 상기하곤 합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단 걸 느끼게 되죠. 가을만큼이나 낭만이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계절도 없을 텐데 가을과 함께 깊어가고 가을을 마신다니. 정말이지 낭만의 정점, 아니 가을 낭만 그 자체 아닌가요?
그러다 부르착을 사러 간 동네 와인 가게에서 주인아저씨가 고개를 저으며 "내년에"라고 말하는 날, 어느덧 따뜻한 와인인 스바쟉*이 식당 입간판에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단 걸 알아차리는 날 저는 아.. 하고 깨닫게 되죠. 올해의 가을도 결국엔 끝나가는구나. 어느덧, 마침내, 지나가는구나 하고요.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된 프라하의 풍경을 바라보며 부르착이 찰랑거리는 잔을 곁에 두고선 조용히 말을 건네봅니다. 올해도 나를 무사히 겨울의 입구까지 데려다 주렴. 너를 즐거움 삼아 가을의 매 순간을 애정으로 대할 테니 부디 나에게 가을을 사랑할 힘을 주렴.
혹시 가을을 사랑할 힘이 필요하다면, 이 계절 낭만 한 방울이 더없이 간절하다면 그대 가을의 체코를 만나러 오세요.달콤하게 입안을 간질이는 부르착을 만나게 된다면, 당신의 가을이 조금 더 사랑스러워질지도 몰라요.
**svařák : 시나몬을 비롯한 향신료를 넣고 끓인 따뜻한 와인. 독일어 이름인 글루바인, 프랑스어 뱅쇼라는 이름으로 좀 더 잘 알려져 있는 유럽의 흔한 겨울 알코올음료.
[체코에서 부르착 구하는 법 & 고르는 요령]
최근 부르착이 여행자에게도 입소문을 타며 투어에 오신 손님들께도 부르착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자주 질문을 받습니다. 어떤 분들은 특별히 맛있는 부르착을 파는 곳이 있다며 40분씩 기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오시기도 하더라고요.
포도의 품종과 생산 와이너리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나, 체코 사람들은 주로 생활 반경 안에서 부르착을 구매합니다. 구글맵에서 와인 가게를 뜻하는 Vinoteka를 검색하고 찾아가면 부르착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저 또한 즐겨가는 동네 가게가 있으나 가게마다 맛이 다르기에 눈에 보일 때마다 여기저기 시도해 보는 편이에요. 개인적으로는 탄산감이 있고 산뜻한 화이트 부르착을 더 선호하지만 개개인의 입맛에 따라 선호하는 와인은 달라질 수 있으니 결정하기가 어렵다면 그 자리에서 1 dcl(데시리터. 체코에서는 와인을 주문할 때 데시리터를 사용합니다.)씩 각각 주문해 맛보고 더 마음에 드는 부르착을 포장해 가는 것도 방법이랍니다.
튀르키예의 9월은 여전히 여름 공기와 여름 색깔로 가득했습니다.
휴가를 즐기는 동안 체코는 홍수로 인해 강변이 모두 물에 잠겨 동물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