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고자 합니다. 갑작스럽게 나에 대한 거창한 정의나 정체성이 떠올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정체성을 정의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한국 정치사상"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방식인데, 정치학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법한 정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에서 소개할 정체성을 정의하는 방식을 다룬 책은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정치학 전공 교수진'이 집필하신 <정치학의 이해>라는 책의 81페이지부터 102페이지까지 이어지는, 3장 한국 정치사상 서설 파트입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정체성이란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우리는 뒤 따라붙는 질문들이 있죠. 바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텀을 두고 관찰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본질이란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것인지 등처럼 말입니다. 소개하고자 하는 이번 책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 방식은 정체성을 "한국 사상을 한국 사상 이게끔 하는 핵심 특징"으로 두고, 두 가지 시험대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시험대를 잘 이해해 본다면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나를 나 이게끔 하는 핵심 특징, 나를 나답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적 다양성의 시험대
첫 번째 시험대는 내적 다양성의 시험대입니다. 이는 우리가 A라는 대상의 정체성을 특정한 조건들로 규정하고 나면, 지금까지 우리가 A라고 불러왔던 것들이 해당 조건들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규정한 정체성의 조건들이 기존에 A로 여겨졌던 것들을 관통하는 특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해당 조건들에서 벗어나는 사례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책상이라는 것의 정체성을 다리가 4개인 나무로 된 물건이라고 규정해보겠습니다. 그럼 내적 다양성의 시험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책상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은 다리가 4개이고 나무로 구성된 물건의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린 다리가 4개이되 철제로 된 책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므로 앞서 규정한 정체성은 내적 다양성의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죠. 즉, 첫 번째 시험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상 내부의 다양한 사례들을 관통할 수 있는 핵심 특질을 지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외적 중복의 시험대
두 번째 시험대는 외적 중복의 시험대입니다. 대상의 고유한 특질이라고 판단하였지만, 전혀 다른 대상에게서도 해당 특질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정체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적 다양성의 시험대는 여러 사례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의인지를 따지는 것이라면 외적 중복의 시험대는 다른 유형의 사례들과 얼마나 구별되는 고유성을 갖느냐와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의 정체성을 눈이 2개인 동물이라고 규정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양이의 여러 사례들을 검토해보았을 때 외상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모든 고양이들이 2개의 눈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눈이 2개인 동물이라는 고양이에 대한 정체성의 정의는 내적 다양성의 시험대를 통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양이가 아닌 동물들에게서도 눈이 2개인 특질들이 여럿 발견되는 것은 예를 들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고양이의 고유한 특질이 아닌 것이죠. 따라서 외적 중복의 시험대는 통과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체성
한국 사상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지만, 그 틀만을 유지한 상태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나를 나 이게끔 하는,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의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인가요?"라고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하실 건가요. 제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엔 제 소속과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예를 들면 "분당중학교 1학년 6반 페이퍼입니다."처럼 말이죠. 대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죠. "OO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 OO학번 페이퍼"라고 소개해왔고, 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는 "OO대학교 대학원 사회과교육학과 석사과정 페이퍼"라고 소개해왔습니다. 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나의 소속을 앞세워 이야기해왔죠.
하지만 분당중학교 1학년 6반이라는 제 정체성은 14살의 딱 1년 만을 수식할 수 있는 특질입니다. 대학교의 학과와 학번도 제 4년 남짓만을 수식할 수 있는 특질이죠. 즉 소속은 제 해당 시기만을 설명할 수 있는, 제 인생 일련의 과정을 수식할 수 없는 특질로 '내적 다양성의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정체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분당중학교 1학년 6반이면 전부 나인가? 해당 대학교 해당 학과 해당 학번이면 모두 나인가? 하는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으므로 '외적 중복의 시험대' 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내적 다양성의 시험대를 통과할 수 있는, 다양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특질은 무엇일까요. 외적 중복의 시험대를 통과할 수 있는, 다른 이들로부터 나를 구별짓는 고유성을 담보할 수 있는 특질은 무엇일까요.
물론 이 두 시험대를 만족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구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질문했을 때 얻어낸 답을 줄줄줄 읊어내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은 주로 나의 소속을 염두에 두고 질문을 던질 것이며, 우리도 그것을 알기에 소속에 기반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통념상으로도 적합할 것입니다. 하지만, 꼭 누군가에게 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에게 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나를 규정하는, 다양한 나를 관통하는 특질과 다른 이들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나의 고유함을 고민해보는 것은 자기 이해의 관점에서도 중요할 것입니다.
저 역시도 아직 제 스스로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번 정치학의 이해라는 책을 통해 얻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지난 삶의 제 모습과 앞으로의 제 모습을 훑어보며 "무엇이 나인가"에 대한 고민을 조금씩 해나가보려 합니다. 여러분도 대답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죠.
당신은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