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해 미치겠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너무나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보다 덜 치열하게 살아가는 주변인이 나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을 보며 드는 억울함과 같은 생각 같은 것 말이다. '그' 주변인보다 내가 수 배는 더 노력하는 것 같은데도, 결과물을 놓고 보면 속상하리만치 나의 결과물은 부족하고 그의 결과물은 풍요롭다. 이런 흐름의 이야기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때가 바로 열아홉 살의 겨울이자 스무 살의 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를 함께 다니며 PC방에서 죽돌이처럼 지내며 게임을 했다. 같이 학원을 째고 놀러 가기도 했으며,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몰래 휴대폰을 하고 잠만 자기 일쑤였다. 그런 친구가, 20년 인생 중 가장 거사라고 여겨질 수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뒀고 나보다 더 좋다고 평가받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나마 친구였던지라 괜스레 갖게 되는 질투와 시기를 잘 달래어 축하하는 마음을 전했으나, 문제는 친구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쟤는 저렇게 해서 어떻게 하려고 할까 싶었던 녀석들이 나보다 좋은 결과를 받아들었고, 스무 살의 봄을 지나 계절이 바뀌어 감에도 SNS를 통해 전해오는 소식들은 내 속을 더 긁기만 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공정을 부르짖는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나의 대학을 결정짓는 수능은 공정하지 않다고. 노력의 크기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잘 돌이켜 보면, 이런 감정과 울분은 비단 열아홉 살의 수능에서만 느낀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전의 크고 작은 시험과 경쟁, 선발 과정에서 이미 자잘한 생채기들이 잔뜩 내 기억 속에 나있을지 모른다. 과연 이런 생채기들은 무엇으로부터 긁혀 생겨난 것일까.
혹시나 하는 우려에, 이번의 작은 끄적임이 결코 현재의 대입 제도에 대한 칭송이 아님을 밝힌다. 나아가 비단 교육에서의 선발 제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성과제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순응을 암시하지도 않음을 밝힌다. 다만 위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시행착오에 관한 것이다.
나부터도 그랬지만, 친구와 놀러가기 위해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놀러가기 전까지 해야 할 분량을 충족하지 못했다면 놀고 온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서라도 남은 분량을 공부했다. 이는 공부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었다기보다도, 부모님이 하라고 하는 공부를 핑계삼아 놀러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던 오기에 가까웠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놀면서도 공부를 잘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친구들에게 나는 소위 노력파가 아니라 '재능충' 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과시욕이기도 했다. 어떤 마음이었든지 간에, 나는 친구들에게 놀러 다니는 아이였으나, 동시에 좋은 성과를 내는 아이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맨날 자고 게임만 하는 것 같던 나의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또래들과의 놀이에 불참하지 않고자 더 많은 시간을 노력했고, 더 적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고민했다. 이러한 노력과 고민은 혼자만의 웅덩이에서 찰싹였을 뿐이었다. 마찬가지였다. SNS에 게시된 늘 술을 마시러 다니는 모습의 친구 계정 피드에 올라온 취업 소식의 이면엔 온통 "준비" 뿐이었다. 또 항상 멋진 사진을 찍어 올리는 친구의 휴대폰 앨범에는, 그 한 장의 사진을 위한 수십, 수백 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다.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누군가의 시행착오는 보이질 않는다. 잘 편집되어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 어쩌면 잘 정돈된 안방의 옷장에 쑤셔 박힌 옷들과 잡동사니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120분짜리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촬영된 120일의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드러나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들이 바로 누군가의 시행착오다.
원숭이가 상자를 척척 쌓고 올라가 막대기로 공중에 달려 있는 바나나를 쳐서 떨어뜨린다. 떨어진 바나나를 먹는 원숭이를 보며, 우리는 감탄한다. 어떻게 저렇게 영리할까? 도구를 잘 활용할까? 그런 원숭이를 보며 처음 우리에 들어온 원숭이들은 시기할지도 모른다. 나보다 멍청하게 생긴 녀석이 단번에 공중에 매달린 바나나를 손쉽게 얻어내는 걸 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원숭이는 그러한 통찰을 얻기 위해, 그러한 성취를 얻기 위해 수십 번 막대기를 휘둘렀을 것이다. 수백 번 막대기를 던져보았을 것이며, 수천 번 상자 위에 올라가 점프했을 것이다. 그런 인고의 시간 끝에, 그 원숭이는 "상자를 쌓고 올라가 막대기를 휘둘러" 바나나를 얻는 성취에 도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