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구)덕후의 패닉
얼마 전 같이 덕질을 하던 덕친들과 연락이 닿았다. 살면서 최고로 열심히 덕질 할 때 만났던 덕친들인데 회사를 다니면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 터라 덕질이고 덕친이고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또 연락이 끊어진 시기와 나와 덕친들의 취업 시기가 묘하게 겹쳤던 터라 휴덕과 탈덕을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렇다. 다들 '현실입갤'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현실 없이 덕질을 할 때는 '(나보다 열 살 많은) 우리 애'가 최고인 줄 알았다. 모든 세상이 으뜸이 위주로 돌아갔고 나의 모든 생활도 으뜸이의 스케줄에 맞춰졌다. 내 으뜸이는 한국보다 9시간 뒤의 세상에 살고 있었는데 으뜸이가 레드 카펫이나 어디 행사에 참여한다! 하면 새벽 세네시까지 모니터 앞에서 기다렸다가 생방을 봤다. 으뜸이가 활동하지 않는 날에는 새벽까지 텀블러로 대표되는 '양웹'과 트위터 등을 돌아다니며 짤을 줍고, 정보를 찾아 새벽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일주일에 7시간 이상 자는 날이 별로 없었다. 방학 때는 정말 모니터 앞에 매달려 살았다. 이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학부 마지막 학년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졸업과 취업이라는 현실이 닥친 것이다.
그래도 몇 년 동안 보고 들은게 영어밖에 없어서 몇 번의 토익 끝에 성적이 만들어졌다. 덕질을 하는 중간에도 '으뜸이와 같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현실 세계의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지며 짧은 대외활동을 했던 터라 이력서에 적을 만한 것은 있었다. 뻥튀기된 자소서와 이력서를 어떻게 보셨는지는 몰라도 그나마 좋게 봐주신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 왔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흑흑) 그렇게 정신없이 회사를 다닌지 1년 째, 밤새가며 덕질을 하던 나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침대에 눕기 바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날 덕친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도 침대에 누워서 팩을 하던 찰나였다. 가끔 나의 으뜸이가 어떻게 사는지 기사로만 접하며 거의 잊고 살았다. 메신저로 '(열 살이 더 많았던 과거의) 우리 애'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요즘엔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다른 덕후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잊고 있었던 옛날이 떠올랐다.
아직 어린 나이라고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이가 적었던 그때는 정말 에너지가 넘쳤다. 하루에 세네시간만 자면서 공부도 하고 덕질도 하는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나왔던걸까? 덕친과 근황을 주고 받으면서 지금은 현실이 너무 바빠 덕질을 하지 못하겠다는 얘기를 했다. 생각해보면 덕질을 할 때는 '나'라는 현실 존재를 거의 잊고 살았다. 나에게 쏟는, 혹은 쏟아야 했던 에너지를 모니터 안의 으뜸이에게 모두 쏟았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한다는 생각에 그 에너지를 나에게 투입하면서 자연스레 휴덕과 탈덕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메신저를 하면서 일 년 사이에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또 없었던 일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 어떻게 덕질을 했는지조차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예전에는 어느 사이트에 가면 어떤 사진을 볼 수 있는지, 특정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사이트에 가야하는지 툭 치면 줄줄 읊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한참 생각해봐도 대충 윤곽만 그려지는 정도다. 으뜸이를 잊어버림과 동시에 덕질을 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커뮤니티에 'ㅇㅇ 덕질하려면 어느 사이트 가야하나요?' 라고 묻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내가 그 사람이 되어버렸다.
덕친과의 대화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나에게 다시 덕질이 찾아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이든, 혹은 다른 취미 생활이든 뭔가에 빠진다는 상상조차 들지 않는 나의 현실이 조금 슬펐다. 덕질뿐만 아니라 최근에 뭔가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생각 끝에 내린 오늘의 결론은(그리고 매번 내리게 되는 결론은), 결국엔 내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이 해결된다면 예전처럼 덕질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좋아하는 것에 빠지게 되는 날이 오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