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잠바를 한 달 째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있다

받아놓고 못입을까봐..

by Claire

수도권으로 이사온 지 올해로 딱 10년 째다. 2008년 5월에 이사를 왔으니 이제 막 10년을 넘어섰다. 서울과 수도권을 오가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대전이 고향이라고 했을 때 반응은 두 가지였다. 1. 성심당! 2. 한화 팬이야?



고향을 밝히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처음 아빠를 따라 야구를 보기 시작했던 해에는 한화가 이럴줄 몰랐다. 왜냐면 그 해에 류현진이 데뷔했기 때문이다.(...) 그 해에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면서 최종적으로는 2위를 한 셈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이럴줄 알았다. 우리에게는 류현진이라는 어마어마한 선수가 있었고 크보 최고의 선구안을 가진 타자를 선두로 한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있었으며 레전드 투수들이 노장투혼을 발휘하며 팀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해부터 가을야구 맛만 보더니 쭉쭉 내려가고.. 중심타자들이 다들 일본에 가버리면서 비밀번호를 찍는 암흑의 시기가 도래했다. 당시 고3때였는데, 인천에 살고 있던 나는 인천 연고팀의 승승장구를 바라보며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같은 반 남자애들은 야구얘기 하는걸 굉장히 좋아했는데 야구 얘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팀은 반조롱거리가 되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땐 정말.. 내가 보기에도 말을 잇지 못할 정도여서 웃고 말아야했다.


야구 보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던 야알못도 할말을 잃게 만드는데, 오랫동안 야구를 보던 올드팬들에게도 이 시절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다들 어이가 없어서 웃던 시절이었다. 다른 팀들은 어이가 없어서 웃는 한화팬들을 보면서 팀이 저런 야구를 하는데 웃는 팬들이라고 보살이라는 별명을 지어줬지만 사실 팬들은 그 별명을 정말로 싫어했고 나도 싫어한다. 화도 낼 줄 모르는 팬들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엔 팬들은 정말 최대한도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야구장 나올때 그 적막감이 감도는 분노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눈치없이 이글스 팬들을 조롱하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당연히 그런 소리를 들어도 되는 팀처럼 말이다.


그래서 최근 몇 년 간은 어디가 고향이라고 말하는게 싫었다. 항상 고향이 대전이라고 하면 고정된 대화루트가 있었다.


1. 고향이 대전이다 -> 2. 야구 좋아해요? -> ‘네’라는 대답 입력 -> 아하하.. 힘드시겠어요(약간 비웃음(으로 느껴지는 말(내가 생각하기에)) -> a. 발끈한다 b. 말을 하지 않는다 c. 얼버무리며 웃는다


이것이 그 루트였다. 하도 많이 듣다보니 a,b를 선택하고 내앞에서 다시는 야구 얘기도 못꺼내게 대화판을 깨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얼마 있지도 않은 인간관계도 망할 것 같아서 가장 대답하기 괜찮은 c를 선택했던 것뿐이다. 그러면 또 눈치없이 한화는 어쩌냐..부터 시작해서 감독을 갈아야하네 유망주가 없어서 그러네 리빌딩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남의 팀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고향만 말했을 뿐인데 뭔 그런 걱정을 그렇게 늘어지게 하시는지. 네네봇이 되어 맞장구를 치긴 하지만 나의 출신까지 조롱받는 기분이 들어 별로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올해는 할까 싶어서


그리고 몇번의 시즌이 흘렀다. 감독 교체가 있었고, 선수 몇 명이 들어오고 나갔으며, 코치진도 대거 바뀌었다. 이제 팀에 기대할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시즌을 시작할 때는 선수들에게 외친다. 많이 바라지도 않고 올해는 가을에 야구 한 번 해보자.


이렇게 외치면서도 현실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작년이었나, 모 스포츠 채널에서 한화 특집 다큐를 한적이 있었는데 다들 거기에서 올해는 가을에 야구하겠다고 해놓곤 또다시...(말잇못) 그 다큐 보고 새벽감성에 젖어서 눈물지었지만 그 이후 성적이 너무 안좋아서 내가 무슨 기대를 한 것일까 하고 큰 현타를 맞은 적이 있다. 올해는 우승반지 끼고 싶다고 해놓고 무슨일..? ㅎ..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른 것 같다. 예전 야구랑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일단 굴러들어온 복덩이가 너무 설레게 하고.. 구종 바꾸고 돌아와서는 설레게 하는 선수도 있고(오늘은 아닌듯)... 그리고 늘상 제자리 지켜주는 테이블세터들과 프랜차이즈 스타가 있다. 시즌이 이 정도 지났으면 비밀번호 찍으러 내려가야 하는데 무슨 일인지 순위표의 낯선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점점 순위가 올라가기 시작하니 다들 이제 가을잠바를 사야할 때가 왔다고 하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도 가을잠바를 장바구니에 담아놨다. 하고 많은 간절기 외투 중에 유독 이 팀로고 박힌 잠바를 사는 데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혹시나 샀는데 못 입고 옷장에 걸어두는게 아닐까, 칰레발은 죄악이랬는데 혹시나 결제버튼을 누르는 죄를 저지르는게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다른 팀 팬들은 잘만 사서 입고 돌아다니던데 나는 왜이렇게 손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팀은 생각보다 잘하고 있고, 오늘도 역전승을 거둬 승수를 쌓았다. 올해 캐치프레이즈를 보고 너무 욕심이 작은게 아닌가 싶었는데 팀은 그 문구대로 판의 모서리부터 금을 내고 있다. 치고 달리며 판을 깨는 선수들을 보면서 이제는 정말로 가을잠바를 사야하는 것일까 다시 고민되는 밤이다. 결제버튼을 눌러야겠다고 확신이 드는 순간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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