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할머니의 과거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렇게 충격적인 가족사가 있을 수 있나 싶어 믿기지 않았다. 할머니의 삶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가슴 한켠에서 뭉클하게 솟아났다. 시간이 흐르자, 늘 한숨 섞인 할머니의 걱정과 고집, 집요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손녀의 아버지는 아픈 과거를 딸에게 굳이 알리지 않는 편이 낫다고 단단히 생각했다. 반면 손녀의 엄마는, 연애 시절 들었던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딸이 성인이 되어 감수성이 무르익었을 때 꼭 전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손녀는 대학생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시절로 치면 다소 늦은 나이였던 서른 즈음, 할머니는 다섯 자녀를 둔 홀아비에게 시집을 갔다. 그 사이에서 손녀의 아버지가 태어났고, 그는 무늬만 막내아들이었을 뿐, 나이 차 많은 형과 누나들 틈바귀에서 눈칫밥 먹으며 야생초처럼 자라났다.
차가 귀하던 시절, 택시 운전을 하며 생계를 책임지던 할아버지 덕분에 할머니는 신혼 초반엔 비교적 넉넉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밤새 돌길을 달리며 일했던 피로 때문이었는지, 불규칙한 수입과 가장의 책임이 무거웠던 탓인지, 손녀의 할아버지는 막내아들이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 중풍으로 쓰러졌고, 그때부터 일곱 식구의 생계는 오롯이 할머니의 몫이 되었다.
짐을 가득 떠안은 채 손녀의 할머니는 서른 후반을 맞이했다. 의붓자식들의 학비, 할아버지의 병원비, 끊임없이 밀려드는 지출에 늘 숨이 막혔다. 하숙비를 제때 받더라도 빠듯한 형편이었건만, 하숙비를 떼먹고 도망가는 이들도 많아 상황은 더 팍팍했다. 그럼에도 막내아들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시간과 정신적인 여유도 할머니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둘째 의붓아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소란을 피우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보호자로서 학교에 불려 나갔다. 그럴 때면 고운 한복을 깔끔하게 다려 입고, 정성스레 차려입은 뒤 작은 봉투를 챙겨 학교에 다녀오곤 했다.
“새벽에 막내 델꼬 서울로 도망쳐 불등가 하소.“
시장통에 그 어린 막내아들을 데리고 나가면 집안의 속사정을 들어 아는 상인들은 손녀의 할머니에게 조언인지 오지랖인지 싶은 말을 던졌지만 두꺼운 책임감 같은 게 귀에 박힌 건지 할머니는 이런 말들을 딱히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지독한 고생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의붓자식들을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를 보내고 나니 하숙집도 팔고 집도 팔아 손에 남은 건 돈 만원쯤이 전부였다. 직장인이 된 막내아들을 서울로 보내고 먼 친척의 집에 얹혀 셋방살이를 했다. 남은 게 없어도 마음만은 홀가분했으려나 모르겠다.
막내를 서울로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에 전쟁 같은 날들이 닥쳤다. 밤마다 코앞까지 들려오는 포탄 소리에, 마음을 졸이며 두꺼운 요로 창문과 문을 막고 며칠을 숨어 지내야 했다. 학살의 시기가 조금 잦아들었던 틈을 타, 손녀의 아빠는 할머니를 모시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사무치는 고생과 조바심으로만 가득했던 광주를 다시는 보고 싶지도 않았겠지 싶다.
그 지독한 고생의 세월을 할머니는 막내아들과 함께 견디어 냈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달 전까지도, 까다롭게 고른 몇 안 되는 깔끔하고 수수한 옷들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다려 입고 성당 주일 미사에 다녀왔다. 평화로운 나날 속에도 저고리를 다리며 여전히 마음을 빳빳하게 다잡았다. 머리카락 한 올도 빠짐없이 머리를 묶어주던 완벽주의에 한숨 쉬던 손녀도 할머니가 보면 손사래를 칠 만큼 깔끔을 떠는 어른이 되었다.
손녀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친척 어른들을 통해 조각조각 들었던 게 전부였었다.
“느그 할머니가 야, 광주 시장통에 걸어 다니면 사람들이 싹 쳐다봤어야. 내가 느그 할머니를 첨 만나러 다방에 갔는디 안직도 그때가 선 해. 다림질 칼 같이 싹 한 옥색 저고리랑 입고 어찌나 부티나등가 몰라. 젊었을 때 참 예뻤어. 느그 할머니 같은 미인은 없었어야.”
손녀는 다 지나간 할머니의 세월을 곱씹으며, 생각으로 밖에 그치지 못한 혼잣말들을 뱉어냈다.
“왜 아빠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어?”
“왜 끝까지 그 줄줄이 소시지들을 다 책임진 거야?”
“할머니가 고생한 쌈짓돈 정도는 챙겨두지 그랬어?”
"왜 그런 할아버지한테 시집을 간거야?"
도대체 왜, 이목구비 또렷하고 늘씬하며 손재주 좋고 손맛 좋은 할머니는 줄줄이 소시지네 홀아비에게 시집을 가기로 마음 먹었는지, 애달프게 궁금해도 물을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너무 늦었다. 할머니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달은 시점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손녀는 할머니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할머니의 그 어떤 작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할머니가 즐겨 먹는 음식을 눈으로 보아 알지만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하고 한 번 묻지를 않았다.
미처 할머니에게 직접 묻지 못 한, 할머니의 아들인 손녀의 아빠에게 전해 들은 몇 조각들로 할머니의 삼십 대를 조용히 그려본다. 할머니의 팍팍한 서른 언저리의 나날들과 비교하자면 손녀는 아주 소소한 불편감으로도 투덜거릴 뿐이다. 할머니가 평생에 쌓은 덕으로, 손녀는 그 사치스러운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