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모든 부분이 기억되기를
오래전 명동성당이었다. 추기경님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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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과 날줄처럼 하루하루의 인생이 만들어집니다.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며 아름다운 줄을 엮을 수도 있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 주어 더러워진 줄을 엮을 수도 있습니다. 한 번 만들어진 줄은 다시 만들 수도, 고칠 수도 없이 내가 입은 옷감이 되어버립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만들어진 그 옷을 입고 우리는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서게 됩니다. 내가 입은 옷이 아름다운 옷이 되도록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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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나는 그 날의 말씀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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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가 걸치고 살아온 옷으로 헤아려진다. 보이지 않는 아래쪽 어디에서, 때로는 덧대 기워 입은 흔적들에서 오히려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게는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말이 무겁다. 기워 입은 흔적까지, 그의 씨줄과 날줄이 가진 사연과 감촉까지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생과, 생이 담은 진심과, 가려진 잘못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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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삶의 몇 가지 행위만으로, 몇 가지 언행만으로도 옷 전체를 평가받는다. 각자의 기준과 취향과 기억에 담아놓은 부분만으로 타인의 옷을 평가한다. 그러하기에 생이 끝나는 날까지 늘 나다운 모습으로, 한결같은 방향으로 씨줄과 날줄을 엮어야겠다고 깨닫는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같은 옷을 걸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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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떤 희생이나 열정으로 세상에 기여했거나, 어느 이들을 위로했거나 또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책임졌다면 우리는 그것을 업적이나 희생으로 부른다. 그리고 더럽고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 또한 얼마나 정성스러운 바느질로 기워왔는지도 함께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누더기 진 옷에 부끄러움을 가진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껴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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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나 가지런한 바느질을 보이며 살았을까나. 나는 어떠한 고뇌와 반성과 성장을 기워가며 살았으려나. 생이 끝날 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깨끗한 옷을 입었기보다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옷을 걸치고 살았던 사람으로 비치길 바란다. 부족하고 더러운 부분을 고치느라 누더기 진 옷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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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옷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지, 어느 단쯤에는 얼마나 지독한 때가 묻어있는지를 하나로 셈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옷에 하나의 등급을 붙이거나 하나의 점수를 매길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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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옷이 제대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의 옷이 가진 깨끗한 부분이 기억되길 바란다. 하지만 기우지 못한 더러운 씨줄과 날줄이 남아있다면 그 또한 마땅히, 옷의 부분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