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way Aug 01. 2016

좀비물에 한국패치를 깔면

부산행(2016, 한국)


* 스포일러와 영화의 여러 요소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예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저는 공포나 긴박감, 신체의 손상(?)을 묘사하는 모든 종류의 영화를 잘 즐기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그 모든 요소를 풀옵션으로 갖춘 '좀비물'이라는 세계에는 얼씬조차 하지 않지요(니콜라스 홀트 주연의 <웜바디스>는 좀비향을 첨가한 하이틴 로맨스이므로 제외. 무척 재밌게 보긴 했습니다). 재난영화 역시, 인간의 악전고투를 지켜보면서 흥미보다 고역감을 더 크게 느끼다 보니 그다지 친숙한 장르는 아닙니다(그쪽 동네에서 마지막으로 재미있게 본 영화가 <투모로우>였네요).

제가 <부산행>을 기대했던 이유는 그것이 '좀비물'이고 '재난영화'라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한국이라는 국가, 너무나 익숙한(그리고 제한된) KTX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현지화에 성공했을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쟁쟁한 배우들과 깐느영화제의 후광 역시 무시못할 이유였고요. '살고 싶으면 부산행 KTX에 탑승하라'는 예고편 카피도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아, 저는 부산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선택한 <부산행>을 관람하는 것은 제게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수없이 많은 한국영화들이 머리속에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지요. 그 영화적 쾌감과 문제의식은 봉준호의 <설국열차>나 <괴물>과 닮았고, 대중영화로서의 전형성은 (차마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해운대>를 떠올리게 하며, 장르영화의 불모지인 한국을 배경으로 이룬 성취는 엑소시즘 영화인 <검은 사제들>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고 싶은 건, '많은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 '진부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 영화의 장점들을 그러모았다는 찬사에 가깝습니다. <부산행>은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형상을 하고 있지만 너무나 익숙하게 즐기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원래 깜짝깜짝 잘 놀라는 성격인지라, <부산행>을 보면서는 한 200번 정도 어깨가 귓불을 치고 내려온 것 같습니다. 러닝타임 내내 "긴장감 고조- 달려드는 좀비떼에 놀람- 헤쳐나가는 주인공들을 긴장된 마음으로 지켜봄- 미션 성공- 숨돌림"을 한세트로 무한 반복하는 기분이었달까요. 특히나 영화 초반부, 부산행 KTX에 처음 바이러스가 퍼지는 순간의 시퀀스는 굉장한 서스펜스를 자아냅니다. '앞으로 관객들을 정신없이 몰고 다니겠다'는 선전포고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 장면이 제게 특히나 무서웠던 이유는, 익숙한 일상이 별안간의 재앙으로 인해 전복되는 순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사람 대부분에게 익숙할 KTX 열차 안에서, 방금까지 화사하게 웃으며 좌석을 안내하던 승무원이 좀비로 돌변해 내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상황. 그 당혹감과 폭발적인 공포를 어설프지 않고, 현실감 있게 그려내는 순간, <부산행>의 순조로운 주행을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부산행>은 그것이 주는 강렬한 즐거움만큼 아쉬움도 존재하는 영화입니다. 사회비판적인 시선은 유지하되 훨씬 대중적인 '첫 실사 장편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감독이 영화의 난이도를 지나치게 낮게 설정해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아빤 이기적인 사람이야!"라고 대놓고 일갈하는 초등학생 딸래미(...)나 뉴스화면을 보며 혀를 차는 할머니들의 입을 빌려, 영화는 하고픈 말을 지나치게 간편하게 늘어놓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조금만 직유와 직설을 자제했더라면, <부산행>은 좀더 세련되게 이 사회의 부조리를 장르화한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그런 태도가 싫지 않았던 이유는, '흥행할 의무가 있는' 상업영화가 권력에 대한 불만과 무책임한 어른들에 대한 질책, 자본가들에 대한 비판을 직설하는 모습이 어쩔 수 없이 속시원하기 때문이겠죠.)





<부산행>에 등장한 배우들을 논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영화 초반, '좀비열차 비긴즈'의 히로인인 배우 심은경은 잠깐의 등장으로 보석같은 존재감을 증명합니다. 나이와 커리어를 떠나 한국 영화계가 보유한 소중한 배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멋짐이라는 것이 폭발하는 마동석은 이 영화로 인해 아트박스 사장을 넘어 본격적인 '마블리월드'의 시대를 열어젖히게 되었군요. 잘생긴 아빠 공유는, 태생적으로 밋밋한 캐릭터의 한계를 안고도 영화의 줄기를 잡고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냅니다. 그와 <도가니> 이후 다시 만난 정유미도 마찬가지.


역대급 발암 캐릭터인 천리마고속 상무 역의 배우 김의성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현실에서의 본인의 행보와는 정반대인 탐욕스런 자본가 캐릭터를 얄밉게 소화함으로서, 온몸을 던져 그들 집단을 까는 느낌이랄까요. 배우 안소희의 연기가 어색하다는 분들도 있던데 저는 뭐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 영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수백명의 좀비 보조출연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한명한명의 엄청난 몸연기가 아니었다면, 공들여 만든 영화가 어설퍼 보였을지도 모르니까요.


명존쎄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김의성님


<부산행>에서 '부산'이란 공간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는데, 사실 딱히 별 함의는 없더군요. 그냥 대전이나 천안아산역까지는 너무 가까우니까 부산까지 가면서 시간을 벌었다는 느낌. 실제로 결말 속 생존자들이 '유일하게 초기대응에 성공한 도시 부산'의 안전한 품에 완전히 안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영화가 종료되는데, 영화를 통틀어 가장 맘에 드는 것이 이 결말이었습니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불빛처럼, 연약한 희망 같은 결말이지요. 한국사회의 축소판인 '레일 위의 지옥'이 내달리는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주던 이 영화가, 그래도 끝끝내 '완전한 파멸'은 아닐 거라며 일말의 바람을 드러내는 것이죠(듣자하니 등장인물 중 최약체가 살아남는 것이 좀비영화의 공식이라고 하더군요).


비슷한 느낌을 받은 장면이 하나 더 있었는데, 야구부 남학생 '영국'이 좀비로 변해버린 야구부 친구들 을 뚫고 가야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한때는 친구였을 그들의 뒷통수를 야구배트로 내려치거나 발등을 내리찍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산행>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여름용 오락영화' 너머까지 닿을 수 있는 건, 이렇듯 순간순간 보이는 공동체에 대한 예의와 일말의 희망론이 있기 때문이겠죠.



저는 공포나 긴박감을 자아내는 영화를 잘 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재미있게 본 영화는 확 사랑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요즘 영화 볼만한 거 뭐 있나?"하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영화가 나온 것 같아 기쁩니다. 그게 누구든 간에 말이죠. 이 무더운 여름, 팝콘 콜라를 양손에 들고 좀비떼가 선사하는 서늘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영화관 피서객이든, "모두 살릴 수도 있었잖아요!" 어른들을 향해 울부짖는 고등학생의 얼굴 앞에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뷰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이든. 자신들의 계획과 반대되는 모든 무리를 '폭도'로 규정하는 명쾌한 사고를 가진, 그 누군가에게 추천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 2016. 7. 26. 19:50 롯데시네마 동래 5관





매거진의 이전글 가난하고 푸른 사랑 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