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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Mar 05. 2017

가난하고 푸른 사랑 노래

문라이트(2016, 미국)

*스포일러는 딱히 없습니다.



1.

여기 세 명의 소년이 있다. 소년의 눈은 그늘지고 항상 아래를 향하고 있다. 소년의 어깨는 자신을 향한 발길질과, 그보다 아픈 경멸의 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항상 한껏 움츠려 있다. 그런 그가 똑바로 앞사람을 직시하거나, 옅은 미소를 짓거나, 무언가 결심의 말을 내뱉을 때마다, 소년은 미세하게  성장한다.


<문라이트>의 줄거리는 별 게 없다. 마이애미에 사는 동성애자 흑인 소년의 성장기. 소년의 삶을 대범하게도 대놓고 툭, 툭, 툭 잘라, 세 명의 배우들이 그렸다. 배우들의 연기는 맑은 날 밤바다와 같이 아주 잔잔해서 가끔 목소리를 높이거나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이 극적인 액션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배우가 마치 한명의 영혼을 주인으로 한 듯 매끄럽게 이어진다. 의심할 나위 없는 연출의 힘이다. 특유의 푸르른 색감도, 수려한 OST도 그러한 몰입감에 일조한다. <문라이트>는 달빛 아래 새벽처럼 작은 기척조차 크게 들리는, 그래서 장면장면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는 영화다.





2.

좀더 컬러풀한, '블랙소울'이 담긴 영화 <파수꾼>같다는 생각을 했다. 파수꾼, 캐롤, 아비정전과 해피투게더 같은 영화들이 <문라이트>를 보는 동안 스쳐지나갔다. 이들 영화를 좋게 봤던 당신이라면 <문라이트> 역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장담한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가 작년 이맘때 극장가에 불었던 <캐롤>신드롬을 재현할 것이라 확신한다(캐롤과는 믿고보는 황석희 번역가님의 손을 거쳤다는 공통점이).


그러나 이미지 중심의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스토리와 엔딩의 명료함을 좋아하는(극장을 나서면서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라는 말을 즐겨하는) 사람,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관용도가 낮은 사람이라면, <문라이트>는 유감스럽게도 최악의 영화가 될 것이다.



3.
등장인물 모두가 흑인인 영화를, 살면서 처음 봤다. 그들 특유의 말투와 제스처, 음악과 의상, 가짜 금니를 악세서리처럼 꼈다뺐다하는 뷰티트렌드(?)를 총망라한 그들만의 정서가 꽤나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어느새 '화이트 헐리우드'에 익숙해져 있는 내 눈에도 화면 가득가득 잡히는 그들의 얼굴은 닮은듯 다채로웠고, 그 자체로 드라마를 담고 있었다. 좋다. 빨리 보고 싶은 <러빙>이나 곧 개봉할 <히든 피겨스>까지, 당분간 이런 류의 신선함을 느낄 수 있어 더 좋다.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가 넘나 매력있었던 것.



4.

많은 말이 없어도, 많은 사건이 없어도 많은 것이 느껴진다. <문라이트>는 내가 최근에 본 어떤 작품보다 영상적 언어만으로 인물의 감정을 담아내는 데 탁월하다. 화면의 반을 채워 일렁이는 바닷물과, 그 위에 떠 있는 흑인 꼬마의 모습에서 (아마도) 삶 최초의 충만한 행복을. 모두가 앞을 향해 전진하는 하교길 급우들 사이로 혼자 주저하는 소년의 눈에서 막막한 소외감을. 홀연히 나타난 벗을 위해 정성들여 요리하는 청년의 옆모습에서 오묘한 설렘을.


괜한 안도감이 들었다. 인간의 감정을 이렇게 깊숙하게 담아낼 수 있는 한, 어떤 신기술로 무장한 화려한 볼거리가 생겨난다 하여도, 영화라는 예술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존재하겠구나.





5.
영화속 소년은 흑인이고 동성애자이며 하층민인, 세상의 비주류성을 모두 모아놓은 존재다. 딱히 멋있지도 그렇다고 처절하게 비참하지도 않은, 딱 미국 구석 어디엔가 실존할 것 같은 어느 존재의 삶을 정성스럽고 섬세하게 그리던 영화는, 아주 후반부가 되어서야 주제인 듯한 대사를 소년의 입을 빌려 말한다. "난 그냥 나야."


그래, 우린 모두 '그냥 나'다. 그 말을 인정하면서 살기가, 자주 왜 그리 힘들까.



6.
뜬금없지만 신경림 시인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가 떠오르기도 했다. 2010년대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흑인영화와 1980년대 한국에서 지어진 시, 이 둘은 묘하게도 닮은 구석이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흑인이라고, 게이라고, 마약상이라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영화가 말한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7.

명상하듯 고요한 마음으로 보았다.

마지막 장면, 푸르스름한 빛 속에 실루엣으로만 남은 소년처럼,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게 하는 영화다.


달빛 아래 모두 푸른색인 우리는 왜 그리 소외되고 소외시키는가.

나를 규정하고 속박하는 수많은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나"라고 말할 용기가 내겐 있는가.


그런 압도적인 여운의 시간을,

이 영화를 당신도 가졌으면 좋겠다.



-2017. 3. 4. 2:15PM CGV김해 6관





+) 낮보다는 밤에, 되도록 늦은 시간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렇지 않으면 극장을 나선 순간부터 하루종일 새벽녘인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관람환경은 <문라이트>를 혼자서 심야영화로 본 다음, 집근처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두어개 사서 이어폰을 끼고 OST를 들으며 휘적휘적 걸어 귀가하는 것.


++)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이 <라라랜드>로 잘못 호명되는 순간은 다시봐도 하..내 열 발가락이 쫙쫙 펴지는 민망함이. 너무 좋은 영화들끼리 한무대에 서서 충격과 뻘쭘을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래도 상 줬으니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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