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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Dec 09. 2015

외계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2003, 영국)



'당신이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어 우주로 나가게 된다면, 딱 하나 CD에 넣어 가져갈 영화와 음악은?'


언젠가 잡지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읽고, 스스로에게 했던 대답이었지요. 러브 액츄얼리. 인류 영화사에 이보다 위대한 영화들은 많겠습니다만, 왠지 우쭐한 표정으로 외계인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구인이란 이렇듯 한없이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들이야' 하면서.



"러-브, 러-브, 러-브" 하는 OST 첫 구절만으로 관객의 가슴에 전류를 흘릴 수 있는 영화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요. 전설의 스케치북 고백씬만큼 감미롭고 유치하고 쓸쓸한 장면이 영화사에 또 있었던가요. 수많은 패러디와 '캡처짤'로 환생하여 인터넷 세상을 떠돌고 있는 로맨스 영화의 전설. 러닝타임 내내 'All You Need Is Love(당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랑)'이라 노래하는, '사랑의 바이블' 같은 이 영화에 대해 새삼 덧붙일 말은 많지 않겠지요.


그래, 이거...


다만 저는 뜬금없게도 언젠가 보았던 가수 이승환 씨의 인터뷰를 떠올립니다. 그는 수십년을 노래한 명실상부 최고의 아티스트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해 목소리 내기에 주저함이 없는 소셜테이너이며, 자신이 구축한 세계 '드림팩토리(그가 운영하는 회사의 이름입니다)'의 공장장이지만,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무엇보다 사랑(그것도 이성간의!)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친다"고. 사랑이라니. 저런 태양계 속 태양 같은 사람도 그토록 진부한 말을 하다니.


진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들었다는 것. 많이 말하고 들었다는 것은, 많이들 생각한다는 것. 사랑이라는 것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장 자주 들춰 보는, 너무 많이 읽어 닳아버린 한권의 책 같은 것. 그것은 영화 속에서 친구의 약혼녀를 짝사랑한 남자의 비극일 수도, 솜털 보송한 꼬마의 첫사랑일수도, 늙은 록스타와 매니저의 우정일 수도, 총리와 비서의 사랑일 수도, 바람에 흩날려간 무명작가의 원고를 건지기 위해 강물에 뛰어든 포르투갈 가정부의 빛나는 발목일 수도, 흔들리는 남편의 마음을 눈치채고서도 사랑스런 아이들을 향해 애써 웃어보이는 중년부인의 붉은 눈시울일수도,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면서도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한 회사 동료와의 어색한 밤일수도 있지요.



이것을 인정하는 당신에게, 꿈도 명예도 정의도 포기할 수 없지만 '결국 사랑' 임을 머쓱한 표정으로 실토하는 당신에게, '러브 액츄얼리'는 단순한 크리스마스용 로맨틱코미디 이상이 될 겁니다.



12년만의 재개봉인가요? 우주에서가 아닌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되어 기뻤습니다.



- 2015. 12. 21. 8:40PM 서면CGV 8관 (재개봉)




+) 덧. 신기하게도 체육복 차림의 여고생들이 단체관람을 왔더군요. 패기 넘치게 앞좌석에 책가방을 걸어놓고 "테이큰 아니가 테이큰(리암 니슨을 그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소근대며, 일렬로 쭈루룩 앉아 깔깔깔 꺄르륵 재미있게도 영화를 보던 소녀들.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에는 유치원생이었을 그들이 사랑을 알 나이가 되어, 추억에 잠긴 어른 관객들과 나란히 앉아 스크린을 공유했군요. 이 멋진 영화가 회상의 대상이 아닌 현재의 기쁨이 될 수 있음에 반가움을 느낍니다. 검증받은 콘텐츠들이 서랍속에서 나와 다시 관객을 찾는 재개봉 열풍을 미더워하는 이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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