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를 닮은 생각들
아가씨.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
아가씨, 라고 소리내어 불러본다. 찬미와 무시의 맛이 동시에 묻어난다. 그것은 때로 젊은 여성의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이고, 때로는 그녀의 젊음과 경험없음을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대하는 말로 사용된다. 지하철에서 만난 어느 할머님이 주름진 얼굴로 활짝 "아유, 예쁘다 아가씨" 하셨을 때의 '아가씨'와, 업무통화 속 어느 중년 남성이 외쳤던 권태롭고 짜증스러운 "아가씨!"의 온도는,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다.
유년기를 졸업한 후 꽤 오랫동안 나는 내 선택과 무관하게 '아가씨'로 살아왔다. 나는 젊고, 젊기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아름다움을 보유했고, 미숙하고, 아직 세상의 많은 면들을 모르고, 자유롭고, 환경적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않았고, 물정을 모르고, 삶의 많은 부분을 나 스스로를 꾸미고 돌보며 할애하는 데 익숙한 존재다.
그리고 3개월 후면 공식적으로 더이상 '아가씨'일 수 없는 나를 생각한다. 그건 실로 대단한 변화다. 나는, 아가씨가 아닌 나와 작별할 수 있을까.
독립해서 한 가정을 꾸린 사람. 그 경험치를 인정받으며, 나는 지금보다 성숙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을때다' 와 '네가 뭘 알겠니' 중간 즈음의 미묘한 눈빛을 더이상 받지 않아도 되고, '그사세'인줄로만 알았던 어른들의 세계에 한발짝 더 다가서게 될지도 모른다. 나이 어린 여성에게 이유없이 가해지는 무례와 희롱, 참견의 말들도 "저 결혼했는데요" 한마디에 좀 줄어들 수 있을까(물론 결혼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말들이 발화되지 않는 세상이 오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동시에 조금 울적해진다. 나는 이제 '아가씨'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젊음과 자유로움, 아름다움과는 조금씩 거리가 먼 존재가 되는 걸까- 하는데까지 생각에 가 닿으면. 돌볼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인, 제약없이 마음껏 세상을 구경하고 공부할 수 있는 아가씨의 홀가분함은 이제 더이상 내 것이 아닌 걸까. 언젠가 나도 그 누군가처럼 부러움에 말끝을 죽죽 늘리며 "아가씨라면서요?" 묻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그 마음의 헛헛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말에 생각이 갇히면 안 된다. 나도 알고 있다. '아가씨'라는 단어가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님을, 나는 나일 뿐임을. 나는 단지 '아가씨' 세 글자로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음을, 그래서 그 단어를 떠나보낸다고 해서 나의 전부와 이별하는 것이 아님을. 이것들은 순전히 나의 선택에서 말미암은 변화들임을, 언젠가는 겪어야 할 성장통임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결혼 전의 내가 어른으로서의 존중을 원하듯이, 결혼 후의 내가 일정이상의 자유를 원하는 것, 그것은 내가 미혼 혹은 기혼이라서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라서다. 그러므로 나는 아가씨나 아줌마(라는 단어는 그래도 싫다, 흑)라는 말에 스스로를 규정짓지 말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주어진 위치에서 가장 나와 주변사람을 행복하게 할 만한 선택들을 하면 된다.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답 없는 생각에 잠못이루는 걸 보면... 메리지블루란 참 무서운 것이다. 아니면 섭씨 32도짜리 열대야 탓인지도 모르지. 시한부 아가씨의 생각들이 무겁고 텁텁한 여름밤 위를 느릿느릿 흐른다. 잠을 못 이룰 이유가 많다.
D-96, 2017.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