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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Aug 13. 2017

주말에, 소파 보러 가요

새로운 삶의 공백을 채워넣는 기쁨



수능을 친 직후의 겨울을 기억한다. 시험을 망쳤다는 절망감에 크리넥스 티슈 한 통을 다 쓰는 등의 푸닥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겨울은 대부분 좋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 겨울의 많은 시간을 나는 곧 다가올 성인으로서의 삶을 긍정적으로 예언하는 데 할애했다. 대학생이 되면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공부했다. 어른들은 '뭐 이제 성인이나 마찬가지니까' 하며 아직은 미성년자인 내 컵에 맥주를 따라 주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결정했다는 홀가분함과, 미래에 대한 기분좋은 긴장과 고민, '고생했다, 축하한다'며 건네는 수많은 등두드림들, 갑자기 찾아온 '예비 어른'으로서의 인정 같은 것들이 나는 퍽 즐거웠다. 그리고 나는, 훗날 그 순간을 그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직장 동료들이 "이번 주말에는 뭐 해요?"라고 물었다. 장난기와 즐거워하는 웃음기가 가득한 눈빛들이었다. 내가 "소파 보러 가요"라고 말하는 순간 예상치 못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딴 것도 아니고 '소파를 보러 간다'는 표현이 너무나 결혼준비스럽다는 이유였다. 기혼인 직장 동료는 "재밌겠다, 그 때가 제일 즐거울 때에요" 라며 본인이 결혼준비 하던 시절의 회상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이 퍽 즐겁고, 묘하게 뿌듯해서 웃어버렸다.





요즘 핫하다는 샤무드쇼파(ㅎㅎ)를 구경하러 시외로 나가는 길은, 조잘조잘 낄낄 수다를 떨며 달리다 보니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매장에는 꿈꾸던 알록달록한 소파들이 가득했고 "먼 데서 오셨고 신랑신부가 예쁘시니까(ㅎㅎ)" 싸게 해주겠다는 직원의 넉살도 싫지 않았다. 이리저리 앉아보고 누워보고, 이것이 우리집 거실을 차지할 모습을 상상하며 조곤조곤 토론했다. 어느 4인용 소파에 둘 다 마음이 가서 결제 직전까지 갔다가 남자친구의 제동으로 이성을 되찾았다. 소파가 너무 커서 거실을 다 차지할 것 같기도 하고, 각자 앉는 거리가 너무 멀까봐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도 맞다며 끄덕끄덕했고, 우리는 좀 더 작은 소파를 살지 생각해 보자며 손을 잡고 매장을 나섰다.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결혼준비하면서 엄청 싸운대'하는 수많은 경고에 겁먹었던 것에 비하면, 우리의 결혼준비는 그럭저럭 순탄하고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집을 고르고(사실 날짜도 잡히기 전에 골랐..), 신혼여행지를 고르고, 식장을 고르고(이건 순탄하지만은 않았..), 그리고 지금은 가구를 고르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게 결혼식과 그 이후의 삶은 거대한 공백과 같아서 손에 잡히지도 않고 상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 백지와 같은 공백을 하나하나 우리 둘의 힘으로 채워나가는 과정이, 나는 퍽 재미있고 소중하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즐겁기만 할 수는 없는 거라서, 우리는 종종 당황하고 속상해하고 언쟁을 하고 눈시울을 붉힌다(이건 보통 내가). 보통은 둘의 주장이 달라서라기보다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속성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몰라 생기는 일들이다. 이런 순간들이 결혼준비가 끝난다고 해서 싹 사라진다고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대학생활이 수능 직후 상상했던 것만큼 즐겁기만 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새로운 기쁨과 고민이 함께 시작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이 시간이 조금 더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지금의 감정들은 지금만의 것이므로, 기쁨도 고민도 조금 더 음미하면서 느끼고 싶다.



그리고 지금 상상하는 미래가 현실이 된 어느 날, 길디긴 결혼생활 중간마다 이때의 기억들을 꺼내먹을 참이다. 손을 잡고 소파를 고르는 순간의 마주 짓던 웃음들을 회상하면서, 그 소파에 드러누워서, 옆에있는 사람에게, 그때처럼 웃어보이고 싶다.




D-69, 2017.8.13




곧 우리집이 될 공간의 아주 작은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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