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아노 May 15. 2024

15일차: 요리는 생각보다 재밌다

100일 글쓰기 15일차 

  올해 목표 중 하나는 요리를 배우는 것이었다. 생활력이 바닥에 가까운 나에게는 나름 큰 결심이었고, 물가가 마구 솟아오르게 되면서 외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과소비로 이어지기도 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도시락을 싸서 다니겠다고 귀엽고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근처 영풍문고에서 팔아서 샀다) 귀여운 도시락통을 사기도 했고, 당연히 그 목표는 지키지 못했다. 직장생활, 대학병원 내원, 운동, 그리고 신입사원이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들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구직활동을 할 때는 내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했다. 회사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무리였는데, 연차를 내지 않고(나는 오후부터 근무가 시작되어 오전 시간을 "활용할 수" 있고 - 누구에게나 체력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이건 결국 회사의 궤변에 불과했다) 외래진료 대기를 세 시간 이상 해 보기도 한 대학병원에 가거나 처음 시작하는 운동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신입사원용 교육을 이수하려면 약 한 달간을 고3처럼, 14시간을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요리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났다. 

  건강이 상해 (그 결과) 쉬게 되면서 이전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요리를 할 필요성이 생겼다. 피티를 등록하면서 한 달 생활비의 1/3을 운동에 쓰게 되었고, 식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밀프렙이라는 걸 알아보기 시작했다. 또, 건강하지 않은 몸은 자극적인 음식을 견뎌내지 못했다. 뭘 먹기만 하면 체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추가로 소화제를 먹게 되었다. 피티를 하고 식단을 조절하게 되면서(감량이 주목적이 아니므로 일반식 세 끼를 정시에 정량으로 챙겨먹기만 하면 된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스트레스성으로 과식을 하거나(최근에는 새벽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뭔가를 집어먹는 좋지 않은 버릇이 생겼고, 지금은 그걸 끊어내려 노력중이다), 중독 상태였던 카페인 수혈을 위해 카페라떼(아니면 플랫화이트나 카푸치노)를 마시는 것도, 그걸로 식사를 떼우는 버릇도 그만해야 했다. 

  잘 하지 못하는 일을 좋아하는 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처음에는 엄마의 구박에(너는 대체 그 학교를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말) 움츠러들기도 했는데, 도전을 거듭하면서 나도 조금씩 발전하게 되었고, 엄마도 답답한 나와 나름의 타협 비슷한 걸 했는지 잔소리 대신 격려가 이어졌다. 처음에 만들었던 것은 스파게티를 밀프렙으로 5일치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날 야채를 고르고 손질하고 썰어넣고 볶아 소스를 만들었다. 나름대로 내 손길이 들어간 음식은 맛있고, 무엇보다 속이 편했다. 이제는 그렇게 한 주의 식사를 마련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오늘은 내 손으로(그리고 엄마의 도움으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칼국수를 끓여먹었다. 무섭던 칼이 점차 익숙해지고,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의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일주일치 동안 금방 조리해 먹을 수 있게 스파게티와 콩나물밥을 미리 준비해두었다. 샐러드를 주문해 먹는 것보다, 장을 봐서 야채와 닭가슴살을 같이 먹는 게 훨씬 싸다는 걸 체감하기도 했다. 내 식습관과 더불어 소비습관(생활비가 크게 줄었는데도 나름대로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도 조금씩 고쳐졌다. 

  무엇보다 가장 많이 나아진 건 자신감이다. 정신건강에 가장 좋은 취미는 요리나 제빵, 뜨개질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올해 전혀 다루지 못했던 코바늘에 다시 도전하게 되었고, 나름 즐겁게 마스터해나가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해 낸 성과가 눈 앞에 바로바로 보이기 때문이란다. 출발점이 0이 아닌 마이너스 상태에서 시작하는 내가 답답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참아야 하지만, 이제는 <길모어 걸스>(주인공인 모녀는 요리를 조금도 하지 않고, 식습관이 나쁘기로 유명하다)를 보면서 맥앤치즈를 먹는 삶과는 헤어질 시간이라는 확신이 든다. 


1902글자

매거진의 이전글 14일차: 헬스를 재등록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