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팬레터>
몇 년 사이 사람들은 '새해 첫 곡'이라는 신년맞이 이벤트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 트렌드는 다른 유형의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씨네필은 새해 첫 영화에서, 연뮤덕은 새해 첫 공연에서 저마다의 의미를 찾아보고는 한다.
나에게 2022년은 본격적으로 연극과 뮤지컬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해였다. 그 해의 첫 공연이 바로 뮤지컬 <팬레터>였다. 4년 전의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이야기 속에 푹 빠져들었다. 말 그대로 심장이 쿵쾅거리게 만들었던 그 작품이, 올해는 무려 10주년을 맞이하여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으로 돌아왔다.
시놉시스 한 글자도 찾아보지 않고 무작정 찾아갔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딱 공연의 제목과 이 작품이 유명하다는 사실 두 가지만 아는 상태였다.
공연이 시작되면 음악과 함께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소설가 김해진과 동반 자살한 그의 연인 히카루에 대한 소문, 그리고 히카루의 유고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하다. 그 소식에 놀란 세훈은 유치장에 갇혀 있는 소설가 이윤을 찾아가고, 이윤은 세훈에게 숨겨진 이야기를 모두 말하라고 다그친다.
1막과 2막, 긴 시간에 걸쳐 세훈이 털어놓는 진실은 해진이 편지로 필담을 이어온 '히카루'가 사실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동경하는 마음을 담아 팬레터를 썼다. 당시 일본에 살던 세훈은 조선어로 글을 쓰지 말라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다른 이름으로 글을 쓰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사용한 필명이 '히카루'였다. 그런데 이 필명이 작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해진이 속한 문학 모임 '칠인회'에 급사(심부름꾼)로 일을 시작한 세훈은, 히카루에게 보낼 편지를 만지작거리는 해진에게 그게 무엇이냐 묻는다. 그러자 러브레터라고 답하며, 히카루와는 사랑하는 사이라 말하는 해진에게 세훈은 도저히 진실을 밝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결국 히카루의 존재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세훈은 해진을, 칠인회를, 그리고 자신을 속이게 되었다. 히카루라는 인물은 정말 존재하고, 살아있는 거라고 말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어설프면 안 돼
거짓을 말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자신을 속여라
넌 그저 나의 다른 이름이었지만
이젠 살아있는 사람인 거야
나의 거짓을 믿자 모든 건 진실이야
그녀는 여기 있어 의심해선 안 돼
/ M7. 거짓말이 아니야 (세훈)
그렇게 편지를 주고 받으며 함께 소설을 써내려가는 둘이었지만, 해진의 폐병이 점점 깊어져 간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해진을 보며, 세훈은 결국 이 모든 걸 멈추기로 한다. 더 이상 편지도, 글도 쓸 수 없도록 자신의 오른손을 찌르고, 울면서 자신을 고백하지만, 해진은 이에 크게 화를 내며 도망치고 만다.
내가 처음 뮤지컬 <팬레터>를 본 건 2022년이지만,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같은 작품을 관람했다. 첫 관람 때는 인물들에 이입해서 감정선을 따라가기 바빴다. 내가 세훈이 아닌데도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불안했고, 또 해진도 아닌데 원치 않는 진실을 눈앞에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 불편했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아마 두 인물도 그런 마음이었으리라.
그다음부터는 매번 극장을 나서면서, 세훈과 해진 중 누가 더 큰 잘못을 했는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게 나의 작은 루틴이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오해는 혼자서 만든 게 아니었고, 그래서 책임소재를 찾자면 끝이 없었다.
- 당연히 세훈이 더 잘못했지. 거짓말을 시작했잖아!
- 아니야, 해진이 더 잘못했어. 어른이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상황 판단도 잘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 근데 해진은 그냥 당한 거잖아. 말한 걸 그대로 믿어준 게 잘못이라고 할 수 있어?
- 오해를 먼저 한 건 해진이고, 세훈이는 해진 선생님을 너무 좋아했던 것뿐이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고.
- 하지만 끝자락에 해진도 어렴풋이 눈치를 챘잖아. 그러면서 끝까지 모르는 척한 건 잘한 거야?
당연히 이 논쟁에 정답이라고 할 건 없었기에, 내 머릿속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한 번은 가짜 투서로 한바탕 혼란을 겪은 칠인회가 이 극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도 같다.
올해 다시 관람한 <팬레터>에서는 조금 다른 게 보였다. 먼저, 세훈도 해진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들이 공감과 이해를 너무나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 서로가 너무나 간절했던 것 같다. 나를 아껴주는 유일한 사람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해진은 자신을 알아주는 히카루를 잃고 싶지 않았고, 세훈은 히카루로 대변되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해진을 잃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그 강한 열망 때문에, 각자의 상황에서 둘 수 있는 최악의 수를 두고야 말았다는 점이다.
괜찮아, 그이는 슬픔을 알아
내 그늘까지 끌어안는 이
때론 그를 안고 힘껏 울고 싶을 뿐
/ M10. Muse (해진)
거울 속 너는 글자를 먹고 자란 나의 반쪽
누구도 나를 사랑한 적 없어
나조차도 나를 싫어해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넌 나의 작고 달콤한 늪
당당하고 아름답고 사랑받는 꿈
/ M16. 거울 (세훈)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눈에 보인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동안의 내가 간과했던 부분은, 그렇게 최악의 선택을 내린 인물들이 그 후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실수를 저질렀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고 도망치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마주하기로 선택한 세훈과 해진. 이 둘의 모습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 아마 이 몇 년 사이에 내가 짧게나마 사회생활을 조금 더 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실수를 외면하지 않고 바로잡으려 하는 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
제발 날 봐요
그건 전부 나였어요
뭐라도 말해요 욕을 해도 좋아
하지만 이대로 숨길 수는 없어
/ M17. 고백 (세훈)
모든 일은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잘못된 환상에서 깨고 싶지 않아서
(중략)
나보다 훨씬 용감한 너를 보고
나도 한 걸음을 겨우 떼어
여기 편지와 원고 받아주면 좋겠다
그녀에게 주고 싶던 꽃과 함께
새삼스레 말이 맴돈다
너의 말들로 그때 내가 버티었다
그게 누구라도,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 M18. <해진의 편지>
해를 거듭할수록, 실수를 아예 안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고, 멍청하게 굴고 싶지도 않은데 항상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행동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을 때도 있고, 애초에 내 잘못된 판단이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지르고 후회하게 되는 일이 꽤나 잦다.
그럴 때면 항상 내 머릿속에 등장하는 두 글자가 있다. 도망.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자. 마치 내 인생이 게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잠깐 껐다 켜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현실은 그렇지가 않지만. 그럴 때면 다른 사람들은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 어떤 용기를 내며 살아가는지, 그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게 참 큰 힘이 된다.
올해의 <팬레터>는 나에게 그런 용기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나, 그런 나의 실수를 마주하고 나아가는 법. 아, 정말 좋은 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