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AI 시대, 일을 다시 설계하는 법

올리비아 리, <일을 위한 디자인>

by 유정

AI가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문장이 이미 낡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주 빠르게. 한때는 이 신기술을 사용하는 게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아서, 노력을 포기하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멀리하던 때가 있었다. 생각을 대신해주는 이 챗봇에게 나의 업무를 맡기면, 그리고 만약 그 업무를 너무나 잘 해준다면, 내 존재 의의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챗지피티의 성능이 어떻다느니, 과제를 위한 자료조사에서는 퍼플렉시티가 좋다느니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나만의 소신을 지키겠다며 계정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AI 없이 업무를 보라는 말이 컴퓨터 없이 일을 하라는 것과 똑같이 들린다.


요즘 AI와 관련된 다양한 화두 중 내 시선을 사로잡는 건, 여전히 '인간의 존재 의의'에 대한 질문이다. AI가 인간을 어디까지 대체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질문은 언뜻 보기엔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가도, 사회에서 내가 설 곳이 어디일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무서운 존재다. 빅테크 기업이 AI 자동화를 통해 인력을 줄인다는 기사를 거의 매일 보는 것 같다. 요지는 AI에게 프롬프트를 일일이 입력해 가며 일을 시키는 게, 아무것도 모르는 주니어를 데려다가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만약 주니어를 AI로 대체하는 게 시대적 흐름이라면, 나와 같이 이제 막 사회 진출을 앞둔 주니어는 어디에서 일을 배울 수 있을까? 무작정 도전하고 부딪히는 게 이 시대의 미덕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안전한 공간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기회를 갖기는 어려워진 것 같다. '현장'에서의 경험이 그 무엇보다 귀해지는 시기임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배움의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을 위한 디자인>을 발견했다. 본업이 디자인은 아니지만 종종 그래픽을 제작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디자인 감각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좋은 디자인 사례를 많이 보고, 실무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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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태도를 디자인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나에게 예상했던 전혀 다른 방향의 깨달음을 제시해주었다. 사실 나는 저자의 이력(삼성전자, 콴다, CJ ENM, 잡코리아의 UX 디자이너)와 제목만 보고 AI로 디자인을 더욱 잘 만드는 법이나 레이아웃의 구성 원칙 같은, 당장 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한 차원 위에서, 일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태도를 논하는 책이었다.


책의 본질적인 목표는 제목 자체보다 표지 한켠에 적힌 영제에서 더 잘 드러난다. 'redesign WORK', 일이라는 것을 다시 설계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프롬프트 한 줄이면 모든 일을 대신 수행해주는 듯한 AI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핵심은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논하기보다, 나는 '어떻게' 일할 것인지 스스로 다시 포지셔닝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태도를 '학습'의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방식이 어떤 상황에서 나를 이 세상에서 나답게 살아가게 하고, 공부가 어떻게 우리 인생을 해결하는 데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공부의 이유와 방법을 몇 개 알아두면, 변화가 다가올 때와 문제가 닥쳐올 때 각각 어떤 태도로 학습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55쪽, <다른 출발점, 같은 회로>



질서 위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법


앞서 말했듯 사회초년생의 미래는 불안하다. 하지만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그 불안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다. 먼저 삶을, 그리고 직업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혜안을 엿보는 것이 바로 그런 방법이다. 올리비아 리는 27년차 디자이너답게 업무를 위한 관점과 태도를 선명하게 전하지만, 이 책의 특별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저자의 삶에서 우러나온 원칙들을 '내가 사랑한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진솔하게 전한다. 그중에서도 내게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질서가 주는 자유로움'에 대한 대목이었다.


그렇게 단단하고 무심한 질서를 세워두면, 그 위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질서는 자유를 막는 벽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지탱하는 바탕이 됩니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출지, 어디에 시선을 머물게 할지에 대한 수많은 선택도 결국 이 질서 위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75쪽, <내가 사랑한 원칙 1. 질서가 주는 자유로움>


이 구절이 와닿았던 건, 바뀌어 가는 세상 속에서 인생을 개척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질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선순위가 명확하지 않으면 주변의 말과 유행에 쉽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 가지 대원칙을 세워 놓으면, 상황이 빠르게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불안한 건 나를 잡아줄 무게 중심이 없기 때문이고, 스스로 내린 질서는 나를 든든하게 잡아줄 버팀목이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설계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서비스를 거쳐왔다. 그는 자신이 단순히 예쁜 화면을 만드는 것을 넘어, 사용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가장 군더더기 없는 길을 설계해 왔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말하는 '설계'가 비단 디자이너의 것만이 아니라고 느꼈다. 사용자들과 만나는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는 사람이든, 기업의 대표 상품을 기획하는 사람이든, 회사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든 모두 저마다의 설계를 하고 있다.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길을 설계하는 일이다.


그런데 AI 시대에 이 설계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언젠가 창조의 영역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사실 재구성에 가깝다. 데이터가 모여 만들어낸 패턴을 학습한 AI는, 이제 그 누구보다 빠르게 그 패턴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집중해야 할 지점은 수많은 재구성의 선택지 중에서 내가 필요한 최적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선별해내는 감각이다. 그 선별의 핵심은 바로 다음 문단에 제시되어 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일부는 보이기 쉬워지고 일부는 사라지기 쉽습니다. 요약은 선택이고, 선택은 해석입니다. 단어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선을 채택하고 세계를 정리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일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필요하지만, 단어 하나로는 다 담기지 않는 감정과 맥락까지 보려는 감각은 더 중요합니다.

193쪽, <단순화와 왜곡의 경계>


메시지를 설계하고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모두 한 번씩 고민해보았을 법한 지점이다. 요즘 시대에 이런 '일하는 방식'에 대한 책의 진짜 가치는 특별한 인사이트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이미 앞서 세상을 경험한 이들로부터 그들은 어떤 경로를 따라 걸었으며 무슨 고민을 했고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하나의 사례를 들여다보는 데 의의가 있다. <일을 위한 디자인>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단단한 사례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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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트는 아트인사이트에서 도서를 무상으로 지원받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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